'詩가 있는 일상'에 해당되는 글 4건
- 2008.07.29 詩가 있는 일상 1
- 2008.07.29 詩가 있는 일상 2
- 2008.07.29 詩가 있는 일상 3
- 2008.07.29 詩가 있는 일상 4
詩가 있는 일상 1
[詩가 있는 일상] 노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 |
출판사를 경영하는 사람과 광화문에서 만났을 때였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사람들로 붐비는 길을 걸으며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가 말했다. “여긴 언제 와도 인텔리들로 북적거리는군요.” “그걸 어떻게 알죠?” 그가 눈길을 주고 있는 사람들을 슬쩍슬쩍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뭔가 다른 분위기가 풍기는 것도 같았다. 젊디젊었으나 일찍 머리가 센 사람, 자유로운 의식이 엿보이는 캐주얼 차림의 사람, 고위직 관료처럼 보이는 사람, 기품 있게 늙은 사람 등등. 얼마 전에는 십여 명의 시인들을 한꺼번에 만날 기회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한중 작가회의에서였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쑤팅과 옌리를 비롯한 중국 시인들은 작년의 중국 회의에서 얼굴을 익혔지만, 같은 나라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처음 만난 우리나라 시인 중 한 사람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는 숲에 놓여 있는 나무토막처럼 무뚝뚝하고 뭉툭해 보였다. 문인들이 모이는 형식적인 자리에 잘 가지 않는 나는 사진을 통해 본 적 있는 그와 실제의 그를, 그의 시를, 얼른 연결 짓지 못했다. 한 방송국에서 피디로 일하고 있는 그는 회의장에 맨 먼저 와 있었는데, 얼핏 그의 외형은 행사 진행을 돕는 사람이 잠시 일손을 놓고 빈자리에 앉아 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 나무토막은, 내가 내 이름이 적힌 명패를 찾아다니다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 앉고 나서도 옆을 돌아보며 아는 체하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 그의 명패를 보았고, 절대 먼저 인사를 할 리 없을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만남은 늘 그런 식인 것 같았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뭉툭한 나무토막처럼 기교 없이 놓여 있는 그의 모습을 악의 없이 재미있어 했다. 자신의 모습을 주변 환경이나 사람들에게 맞추어 조율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그는, 남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맘껏 즐기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면, 나도 한 인간의 외모를 이처럼 세세히 글로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시는 쓸쓸하되 달콤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향기롭고, 결이 많고, 여운이 크다. 차분한 마음으로 읽지 않으면 그만이 가진 상상력이라는 기류를 타고 상승의 기분을 만끽하지 못한다.
그대는 엎질러진 물처럼 누워 살았지
'문병'과 같은 시를 쓰는 시인이 부드러운 곡선을 늘어뜨리고 바람에 출렁대며 우아하게 서 있는 나무처럼 보인 것이 아니라 딱딱하고 뭉툭한 나무토막처럼 기교라곤 없어 보였다는 사실 자체가 낯섦 그 자체였지만,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모습조차 낯설게 보일 때가 있는 법이다. 우주를 도서관으로, 낙원을 도서관의 형태로 상상했다는 세계적인 작가 보르헤스도 어느 날 갑자기 거울이 자신의 얼굴이 아닌 다른 얼굴을 비출까 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늘 안정되길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낯선 대상 앞에서 멈칫대지만, 언제나 익숙한 것만 보고 살아야 한다면 당장 오늘 하루가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중국어로 번역된 '문병'을 비롯한 그의 시를 읽던 중국 시인들은 왠지 그만이 가진 음색을 놓치는 것 같아 보였고, 나는 그 점이 내내 안타까웠다. 아직도 역사의 상처로부터, 체제와 이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중국 시인들이, 또는 나날이 감성이 무디어진다며 정신적 노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그의 시를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조은 / 시인. |
詩가 있는 일상 2
[詩가 있는 일상] 자서전을 쓰고 싶을 만큼 열심히 살아 보기나 하자 | |
“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의 마음을 슬슬 쓰다듬는 것 같은 그의 시를 읽고 있자니 내 안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느껴졌고, 처음으로 그가 쓴 시로부터 강한 울림을 받았다. 그 시는 환자의 쾌유를 갈망하는 간절한 마음과 겹쳐지며 내 안에서 점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자서전을 남겼거나 남기고자 하는 이들에게 내가 존경심을 느낀 것은 최근이다. 과거의 나는 그들을 약간은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내 인생은 기록될 만하다'는 자신감 또한 덜어 내야 할 세속적 욕망이라고 여겼던 탓이다. 그러나 요즘 와서는 전문 글쟁이들이야말로 가장 욕망적(비록 정신적 욕망일지라도)인 존재라는 생각도 든다. 그들은 글을 통해 자신의 내면 세계를 알리고, 직간접적으로 타인의 삶에 개입하며, 고집스럽게 자신의 논조로 바깥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다. 그 욕망을 위해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선생도 글감이 되는가 하면, 엄연한 사실이 왜곡되기도 한다. 가끔은 어떤 글의 적나라한 소재가 된 사람이 분을 못 이겨 펑펑 우는 모습을 볼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남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데는 아무런 반감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타인들이 성찰하는 데에는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성공한 사람의 자서전에 부정적으로 거론된 사람이라면, 분명 기분이 무척 나쁠 것이다. 비록 그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라도 영영 자신의 이미지를 바로잡을 수가 없으니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더 억울할 거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의 평가가 글쓴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점으로 봐서, 사람의 가치는 관계 맺는 대상과 상황에 달렸으니 타인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도록 내성을 길러야겠다.
그들은 자신의 연애 감정이 타인의 멜랑콜리한 정서를 건드려 쉽게 공감된다는 사실을 교활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가끔은 ‘어떻게 그 사람이 이런 시를 썼을까?' 싶을 만큼 말초적 신경만을 살짝살짝 건드리는 시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도, 별다른 노력 없이 연애의 상승효과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 종합병원의 소아 암병동에 갔을 때였다. 내가 찾아갔던 아이는 뇌종양으로 힘든 항암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여든의 노인이 그 아이를 간병하는 안팎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 아이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병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 붙어 있는 한 편의 시를 보았다. 그 시를 쓴 시인은 일반인에게는 너무도 잘 알려졌으나, 전문 글쟁이들에게는 ‘사랑'을 남발하며 독자들의 말초신경만 건드리는 흔하디흔한 글쟁이에 불과한 사람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사람의 마음을 슬슬 쓰다듬는 것 같은 그의 시를 읽고 있자니 내 안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느껴졌고, 처음으로 그가 쓴 시로부터 강한 울림을 받았다. 그 시는 환자의 쾌유를 갈망하는 간절한 마음과 겹쳐지며 내 안에서 점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시인들도 가끔은 연애시를 쓴다. 개인적으로 나는 오규원이라는 시인을 좋아하는데, 시는 말할 것도 없고 평생 지치지 않고 추구해 온 그의 시정신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 치열한 시적 탐구과정을 통해 얻은 훌륭한 시가 많건만, 일반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져 애송되고 있는 시는 뜻밖에도 그의 시적 업적과는 거리가 먼 연애시이다. 이 같은 연애의 감정이 없었다면, 그는 딱딱한 정신을 가진 이상주의자밖에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한 잎의 여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는 자신이 쓴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글을 따로 모아 책을 냈을 정도로 시인으로서 제대로 평가받고자 욕망했던 것이다. 살아서 이미 명성을 날린 사람들은 훗날 타인이 쓰는 ‘평전'을 통해 삶이 재조명되기도 하지만, 평범한 우리에게 생생하게 와 닿는 것은 저자의 육성이 녹아 있고 감정의 굴곡이 그대로 전해지는 글이 아닐까 한다. 요즘 내가 읽는 책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의 저자(칼 포퍼)가 쓴 자서전( <끝없는 탐구)> 이다. 그의 글은 ‘나는 인간이다'와 같은 명징한 명제에 안도하는 빈약한 우리의 사고 패턴을 역설적으로 지적하며 점점 반증적 검증 요소(입증적 검증 요소가 아니다)가 많아지는 현실에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 준다. 그는 이성과 분별력이 지닌 최고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비판에 열려 있음이라고 강조한다. 이제야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통해 자서전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길 만큼 열심히 살아 보기나 해야겠다고 자각한다.
조은 / 시인. |
詩가 있는 일상 3
[詩가 있는 일상] 강에 가서 말하라 | |
"황인숙은 독신에다 전업 시인인데, 전화를 잘 받지 않고 휴대전화도 없는 그녀와 통화를 하기란 무척 어렵다. 누군가가 얼마나 일방적으로 쓸모없는 이야기를 쏟아 부었으면 온갖 희로애락이 통신망을 통해 전달되는 요즘 같은 세상에 들어앉아 이런 시를 썼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 불쑥불쑥 잡념이 끼어든다. 날씨가 무더워 정신이 느슨해졌기 때문인가 보다. 늘 이성이 강조되곤 하는 인간의 사고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인지과학자들의 주장이 맞는 걸까. 그 때문에 예부터 면벽참선이니 화두니 정진이니 하는 말이 있어 왔던 걸까. 한순간에 정신이 육체나 분위기에(이깟 더위에!) 지배당하기도 하는 것으로 봐서 ‘이성은 우리의 동물적 본능을 초월하지 않고 이용'하며, ‘몸에서 유래한 이성은 몸을 초월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주장에 점점 힘이 실린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 그다지 절망스럽지만은 않다. 남들이 다 꿰뚫고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모르고 사는 것이 더 무섭다. 그런 한편 아직도 나는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는 게 괴롭고, 누군가에게 지적당하는 순간이 곤혹스럽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끼긴 한다. 남의 능력은 인정해 줄수록 내 마음이 편하고, 나의 결점을 빨리 인정하면 할수록 열등감이 극복되는 기분이다. 가끔은 도저히 개성을 인정해 줄 수 없는 사람을 만난다. 남에게 거침없이 요구하는 바로 그 점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임을 자신만 모르는 종류의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목소리가 우렁차고 에둘러 말할 줄 모르며, “솔직하게 말해서”를 연발하면서 남의 염장을 지른다. 그들의 드센 기를 꺾으려면 목소리가 기차 화통은 되어야 하고, 같은 말을 백 번 해서라도 그들을 응징하겠노라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하고, 끝내 그 철벽을 무너뜨리지 못해도 절망하지 않을 만큼 담대해야 할 것이다. 그걸 감수할 사람이 없으니 그들은 무법천지에서 살고 있다. 함께 사는 질서를 무시하는 자들이 밤늦게 전화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며 온갖 불만을 꾸역꾸역 뱉어 내는가 하면, 타인에 대한 정보도 거르지 않고 쏟아 놓는다. 그것은 결코 올바른 소통 방식이 아니다. 그런 전화를 받기 싫어 밤이면 전화 코드를 뽑아 놓기도 하지만, 그들이 남을 낚는 기교와 구실은 참으로 다양해서 그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도 힘들다. 혼자 사는 사람이, 특히 혼자 사는 여자가, 전화를 성실하게 받지 않는다면, 그 같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강'을 보는 순간 나는 대번에 그 시가 왜 쓰여졌는지 알아차렸다. 황인숙은 독신에다 전업 시인인데, 전화를 잘 받지 않고 휴대전화도 없는 그녀와 통화를 하기란 무척 어렵다. 누군가가 얼마나 일방적으로 쓸모없는 이야기를 쏟아 부었으면 온갖 희로애락이 통신망을 통해 전달되는 요즘 같은 세상에 들어앉아 이런 시를 썼을까…
*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강에서는 우리 내게도 가끔 황당한 전화가 걸려 온다. 한 번은…, 집에 중환자가 있어서 밤늦게 울리는 전화에 병적으로 예민해 있을 때 걸려 왔다. 가족들은 서로 그 점을 헤아려 급히 연락할 일이 있어도 기다렸다가 아침에 연락을 하곤 하던 때였다. 신경이 곤두서 늦게 잠들었던 나는 전화의 첫 번째 신호음이 채 다 울리기도 전에 깜짝 놀라 눈을 떴고, 정신없이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전화기 저편의 목소리가 대뜸 말했다. 나는 전화 속 목소리를 기억해 내려 애썼다. 그런데 횡설수설하는 말을 듣자니 그는 만난 적이 없을뿐더러 전화로도 인사를 나눈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제법 시를 잘 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떤 이유로도 그 시간에 내게 전화해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확신한다는 투로 “접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불쾌감에 잠을 설친 다음날 피곤한 상태로 생각해 보니 언젠가 내가 신문 문화면에 그의 시를 소개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가 새벽에 남의 집에 무작위로 전화를 해대는 무례한 사람임을 소문을 통해 알고 있었음에도 무시당했다는 기분은 지워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찬찬히 '강'을 읽어 보니 웃음이 나온다. 황인숙 시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사람이다. 늘 만나면 재잘재잘 사람을 웃기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몇 권 낸 그녀의 재미있는 산문집을 읽으면서도 나는 막연히 그 점을 느꼈다. 재미있는 그녀의 글을 읽고 난 후 느껴지는 묘한 갈증은 그 때문인 것도 같다. 그런 사람에게 누군가의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까지 떠벌렸을 사람을 생각하면, 그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을 그녀를 생각하면, 안 웃을래야 안 웃을 수가 없다. 황인숙 시인은 문단에서 꽤 기인으로 통한다. 그녀는 늘 약속시간에 늦게 선물꾸러미를 들고 나타난다. 나타나서는 자신이 양손에 바리바리 들고 온 짐에 치였노라며 신경질을 바락바락 낸 후 꾸러미를 풀기 시작하는데, 그 속에서는 별의별 게 다 나온다. 심지어는 노란 때수건까지. 감수성이 뛰어난 시인이되 현실감각이 없다는 것은 그녀가 다른 사람을 위로할 때 느껴진다. 가끔 그녀가 내게 하는 위로의 말을 듣고 있으면 ‘지금 이 사람이 나를 약 올리고 있는 건가?' 싶을 만큼 위로의 초점이 늘 조금씩 어긋나 있다. 드디어 나는 혼자 앉아 큰 소리로 웃고 만다. 전화를 해서 떠벌렸던 사람은 과연 듣고 싶던 위로의 말을 그녀로부터 듣기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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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 있는 일상 4
[詩가 있는 일상] 빗물의 언어, 스스로 부서져 풀 한 포기라도 피우는… | |
"무지개는 비 속에 잠재해 있는 극단의 아름다움이다. 물론 비 속에는 풍요, 광란, 사랑, 인내, 질서, 무질서, 얼음, 불, 심지어 폭력의 이미지까지 들어 있다. 모든 대상이 극단을 향해 치달을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삶을 통해 더 나은, 더 아름다운 세계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존재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오랜만에 우리 집에 손님이 왔다.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손님과 나는 열네 살 차이가 난다. 큰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우리는 서로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면 반드시 ‘친구'라고 한다. 낡고 작은 한옥에서 부대끼며 사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평생을 넉넉하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친구는 자신이 번역한 따끈따끈한 신간 두 권을 놓고 갔다. 일찍이 그녀는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 미시간에 가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왔을 정도로 학구적인데다 자태가 우아하다. 그녀의 지성은 늘 매력적으로 발산돼 조용히 다녀도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반대로 나는 너무도 평범해 눈에 띄는 행동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녀는 나를 통해 서민들의 삶을 배우고, 나는 그녀를 통해 상류층 사람들의 삶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나는 작년부터 집 옆 구민체육센터에 다니고 있고, 그녀도 집 근처 스포츠센터에 다니고 있다. 내가 가끔 체육관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면 그녀도 자신이 다니고 있는 스포츠센터에서 일어난 해프닝을 말해 주곤 한다. 한 번은 발목 아래까지 내려오는 모피 코트를 입고 왔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옷을 도둑맞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로서는 잃어버렸다는 옷의 가격부터가 놀라웠다. “그래서, 끝내 그 옷을 못 찾았어요?” 친구는 소리 없이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녀는 곧 떠날 여름휴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휴가 계획이 없는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 덮인 히말라야와 피라미드, 티티카카와 바이칼, 자작나무 숲과 백두산 천지를 생각했다.
광화문 근처에 있는 우리 집은 좁지만 아늑하다. 봄이면 대문 안으로 경희궁공원의 아카시아 꽃잎이 날아와 소복 쌓이고, 가을이면 금화처럼 동글동글한 나뭇잎이 발자국 소리를 내며 굴러 온다. 우리 골목의 몇몇 집들은 경희궁공원과 담장을 공유하고 있다. 담장 이편은 개인 집 마당이고 저편은 경희궁공원 뒷마당이다. 어떤 집에서는 아예 그 담에 쪽문을 내서 마당에서 곧바로 경희궁공원 뒤뜰로 들어가 운동을 하거나 숲을 거닌다. 울창한 경희궁공원 숲 덕분에 집을 비우면 참새들이 실내로 들어왔다 가기도 하고, 배가 등가죽에 붙은 어미 고양이가 어린 새끼를 데리고 와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도 한다. 가끔 먹이를 줬던 고양이 한 마리가 생각난다. 그 고양이는 사람들이 놓은 약을 먹고 우리 집으로 와서 여섯 시간 만에 죽었다. 죽음은 처절했다. 짧은 생애 동안 우리 집이 그나마 가장 편안했던지 회귀하는 연어처럼 기를 쓰고 찾아와 녀석이 죽어가는 동안,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몇몇 사람들은 녀석의 죽음을 액운 운운하며 섬뜩해 했지만, 나는 죽어가는 한 생명이 찾아올 수 있었던 공간의 너그러움이 느껴져 그들의 말에 동요되지 않았다. 그런 일들은 오래 되새김질한 뒤에 시가 되기도 한다. 평소에는 대문을 잘 열어 두지 않지만 폭우가 쏟아지면 가끔 대문을 열어 놓는다. 골목을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데다 거추장스럽게 우산을 쓰고 남의 집을 넘보는 위인은 없을 테니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하루 종일 내리꽂히는 비를 보고 있으면 비로소 비의 언어를 이해한 듯한 기분이 되곤 하는데, 그것은 시를 쓰는 내겐 큰 수확이다. 비 * 조은 저렇게 몸이 부서져야 제 몸을 허공에다 한 순간의 무지개로 자신의 삶을 통해 더 아름다운 세계를 일깨우는 것들 무지개는 비 속에 잠재해 있는 극단(너무도 짧다는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이다. 물론 비 속에는 풍요, 광란, 사랑, 인내, 질서, 무질서, 얼음, 불, 심지어 폭력의 이미지까지 들어 있다. 모든 대상이 극단을 향해 치달을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삶을 통해 더 나은, 더 아름다운 세계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존재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한 번은 황동규 시인과의 대화 중에 “조은 씨는 아직도 그 집에 사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 후 이어지는 정적이 어색해서 말을 이었다. “제 능력으로는 제 집을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관에 담겨야만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나는 그 말을 하자마자 꾸중을 들었다. 대학에서 정년퇴임해 쉬고 있는, 그야말로 선생님 앞에서 ‘관' 운운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솔했다는 후회가 깊어진다. 황동규 시인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소설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이고, 나의 아버지는 소시민이라, 그는 나의 사회적 기반이 무척 아슬아슬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고, 아니나 다를까 “조은 씨는 정말 독종이군요!” 했었다. 그런 일도 있었는데 ‘관' 운운했으니 지난 이미지를 쇄신하기는커녕 한술 더 뜬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다. 반성만 하면 삶은 뒷걸음질 친다. 반성도 삶의 에너지가 될 만큼만 하는 것이 현명할 터, 나는 지금의 나를 고무줄처럼 과거로 끌어당기는 지독한 반성이라는 덫에는 걸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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