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29. 08:33

詩가 있는 일상 1

[詩가 있는 일상] 노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출판사를 경영하는 사람과 광화문에서 만났을 때였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사람들로 붐비는 길을 걸으며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가 말했다.

“여긴 언제 와도 인텔리들로 북적거리는군요.”
십여 분이면 광화문까지 걸어갈 수 있는 곳에서 이십 년 가까이 살고 있는 나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말에 되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죠?”

 “보면 저절로 알게 되지요. 저 사람들이 그냥 사무직인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의식이 높은 전문가들인지….”

그가 눈길을 주고 있는 사람들을 슬쩍슬쩍 보니 아닌 게 아니라 뭔가 다른 분위기가 풍기는 것도 같았다. 젊디젊었으나 일찍 머리가 센 사람, 자유로운 의식이 엿보이는 캐주얼 차림의 사람, 고위직 관료처럼 보이는 사람, 기품 있게 늙은 사람 등등.
 
나는 사람들이 밖으로 풍기는 이미지를 그대로 믿지 않는데, 그건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서이다. 얼마나 많은 순진무구한 얼굴이 평생 잊지 못할 씁쓸한 기억을 남겨 놓고 떠났으며, 아무 기대도 없었던 사람으로부터 뭉클한 인간적 감동을 받았던가. 지식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의 교묘하게 위장된 언어의 폭력성은 또 어떠한가.

얼마 전에는 십여 명의 시인들을 한꺼번에 만날 기회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열린 한중 작가회의에서였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쑤팅과 옌리를 비롯한 중국 시인들은 작년의 중국 회의에서 얼굴을 익혔지만, 같은 나라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처음 만난 우리나라 시인 중 한 사람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는 숲에 놓여 있는 나무토막처럼 무뚝뚝하고 뭉툭해 보였다. 문인들이 모이는 형식적인 자리에 잘 가지 않는 나는 사진을 통해 본 적 있는 그와 실제의 그를, 그의 시를, 얼른 연결 짓지 못했다. 한 방송국에서 피디로 일하고 있는 그는 회의장에 맨 먼저 와 있었는데, 얼핏 그의 외형은 행사 진행을 돕는 사람이 잠시 일손을 놓고 빈자리에 앉아 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 나무토막은, 내가 내 이름이 적힌 명패를 찾아다니다 자신의 바로 옆자리에 앉고 나서도 옆을 돌아보며 아는 체하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 그의 명패를 보았고, 절대 먼저 인사를 할 리 없을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만남은 늘 그런 식인 것 같았다.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뭉툭한 나무토막처럼 기교 없이 놓여 있는 그의 모습을 악의 없이 재미있어 했다. 자신의 모습을 주변 환경이나 사람들에게 맞추어 조율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그는, 남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맘껏 즐기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면, 나도 한 인간의 외모를 이처럼 세세히 글로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시는 쓸쓸하되 달콤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향기롭고, 결이 많고, 여운이 크다. 차분한 마음으로 읽지 않으면 그만이 가진 상상력이라는 기류를 타고 상승의 기분을 만끽하지 못한다.


문병

                                           * 문태준

그대는 엎질러진 물처럼 누워 살았지
나는 보슬비가 다녀갔다고 말했지
나는 제비가 돌아왔다고 말했지
초롱꽃 핀 바깥을 말하려다 나는 그만두었지
그대는 병석에 누워 살았지
그것은 수국(水國)에 사는 일
그대는 잠시 웃었지
나는 자세히 보았지
먹다 흘린 밥알 몇 개를
개미 몇이 와 마저 먹는 것을
나는 어렵게 웃으며 보았지
그대가 나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으므로
그대의 입가에 아주 가까이 온
작은 개미들을 계속 보았지   


'문병'이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 시인이 알고 있는 누군가가 아팠다(엎질러진 물처럼 누워 살았지). 그는 보슬비가 내릴 때도 제비가 돌아올 때도 아팠고, 초롱꽃이 필 때도 아팠다. 시인은 병상의 그를 위해 자연의 정령처럼 아름다운 바깥 풍경을 전해 준다. 환자는 잠시 웃는다(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해 보라). 한쪽에서는 삶이 쇠해 가도 다른 쪽에서는 삶이 왕성해서 문병을 오기도 하고, 개미들은 환자가 먹다 남긴 밥알을 와서 먹는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인의 손을 환자는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찾아와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일 수도 있고 지독한 외로움의 발산일 수도 있으며, 절절한 삶의 욕구일 수도 있다. 또 어쩌면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잘 살아갈 사람에 대한 질투심의 숨은 표현일 수도 있으며, 삶을 마무리하는 자만이 가질 법한 타인에 대한 자비심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쓸쓸하고 애잔하고 안타깝고 허무하다. ‘입가에 아주 가까이 온 개미들'이 암시하는 대로 그는 이제 곧 죽음을 맞을 것이다.

'문병'과 같은 시를 쓰는 시인이 부드러운 곡선을 늘어뜨리고 바람에 출렁대며 우아하게 서 있는 나무처럼 보인 것이 아니라 딱딱하고 뭉툭한 나무토막처럼 기교라곤 없어 보였다는 사실 자체가 낯섦 그 자체였지만,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나 자신의 모습조차 낯설게 보일 때가 있는 법이다.

우주를 도서관으로, 낙원을 도서관의 형태로 상상했다는 세계적인 작가 보르헤스도 어느 날 갑자기 거울이 자신의 얼굴이 아닌 다른 얼굴을 비출까 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늘 안정되길 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낯선 대상 앞에서 멈칫대지만, 언제나 익숙한 것만 보고 살아야 한다면 당장 오늘 하루가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중국어로 번역된 '문병'을 비롯한 그의 시를 읽던 중국 시인들은 왠지 그만이 가진 음색을 놓치는 것 같아 보였고, 나는 그 점이 내내 안타까웠다. 아직도 역사의 상처로부터, 체제와 이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중국 시인들이, 또는 나날이 감성이 무디어진다며 정신적 노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그의 시를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 글

조은 / 시인.
시집으로 <무덤을 맴도는 이유>ㆍ<따뜻한 흙>이 있으며, 산문집 <벼랑에 살다>, 장편동화 <햇볕 따뜻한 집>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