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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8.03 추억하고 싶은 것들 1
추억하고 싶은 것들 4
추억하고 싶은 것들 - 그 시절 우리 삶의 ‘프로그램’이었던 생활 풍습들 | |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삶과 죽음은 일상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자연스런 풍경이었다. 대문에 걸린 노란 금줄을 보며 이웃집에 새 생명이 태어난 걸 알았고, 담장 너머 둥둥 떠가는 꽃상여를 통해 동네 어르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동네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제 일처럼 나섰고, 그렇게 서로 돕는 마음은 슬픔마저도 정화하는 힘이 되었다. 전통혼례, 전통장례, 굿, 금줄, 서낭당… 이제는 민속촌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풍경이 되어 버린 우리의 생활 풍습들.
한 집에 혼사가 있으면 마을 전체가 들뜨게 마련이었다. 아낙네들은 잔칫집에 모여 전을 부치고 떡을 하느라 종종걸음 쳤다. 사내들은 바깥마당에서 돼지를 잡고 아이들은 그 주변을 맴돌았다. 혼례식은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치렀다. 옛날에는 대례를 치르고 짧게는 3일, 길게는 첫아이를 낳을 때까지 처가에 머물렀다고 한다. 신랑이 도착해서 혼례청에 들어서면, 주례를 맡은 동네 어른이 식을 이끌어 갔다. 신랑이 기러기를 드리는 전안례, 신랑 신부가 손을 씻은 다음 맞절을 하는 교배례 순으로 진행됐다. 신랑 신부가 표주박을 둘로 나눈 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 합근례, 하객과 어르신들께 감사의 절을 올리는 보은보배를 마치면 주례의 덕담과 함께 식이 끝났다. 식이 끝나면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마당에 깔린 멍석 위로 상이 놓이고 술잔이 질펀하게 오고 갔다. 잔치는 밤이 이슥하도록 계속됐다. 청년들은 자기 동네 처녀 데려간다며 ‘신랑 길들이기'를 시작하고, 장모는 귀한 사위 살살 다뤄 달라고 술상을 들이고…. 신랑 신부가 신방에 들어도 시련은 남아 있었다. 불이 꺼지면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가 창호지에 구멍을 내는 아낙들의 장난기 가득한 눈…. 그렇게 혼인날의 밤은 깊어 갔다.
어느 정도 규모의 마을에는 서낭당이 하나씩 있었다. 마을과 토지를 지켜 준다고 믿었던 존재가 서낭신인데, 그 서낭신이 붙어 있는 나무나 돌무더기를 서낭당이라고 했다.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서낭신이 머물 사당을 짓기도 했다. 이를 당집이라고 불렀다. 서낭당은 마을의 안녕을 지켜 주고 잡귀나 병을 막아 주는 역할 외에도 멀리서 돌아오는 가족을 마중하고, 떠나는 가족을 배웅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동네를 지나던 나그네가 서낭당을 만나면 돌을 하나 얹거나 침을 뱉었다. 돌을 얹는 것은 원하는 것이 이뤄지도록 해 달라고 염원하는 의식이며, 침을 뱉는 것은 길 위를 떠도는 악령의 해를 막기 위한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해마다 정초가 되면 서낭당에 왼새끼로 꼰 금줄을 쳐서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했다. 그리고 마을에 불행한 일이 닥치지 않도록, 농사가 풍년이 들도록 기원하는 제를 지냈다. 농촌에서조차 서낭당을 보기 힘들게 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길을 넓힌다는 명분으로 아름드리 당나무가 뽑혀 나갔고 돌무더기가 사라졌다. 또 '미신(迷信) 타파'라는 이름으로 공개재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랜 세월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했던 서낭당은 그렇게 하나 둘 사라져 갔다.
모내기철이 되면 마을마다 활기가 넘쳤다. 어제는 철수네, 오늘은 순희네, 내일은 광철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돌아가며 모내기를 했다. 그런 날의 들판은 제법 흥겨웠다. 아무리 가난해도 모를 내는 집은 들밥을 풍성하게 차려 내오게 마련이었다. 막걸리 몇 잔과 빈 논이 줄어드는 재미에 취한 사람들은 힘든 줄 모르고 일을 했다. 그게 바로 품앗이의 힘이었다. 품앗이는 다른 가족의 노동력을 빌려 쓰고, 그 집에서 필요할 때 노동력으로 돌려주는 것을 말한다. 모내기뿐 아니라 김매기, 가을걷이, 이엉 올리기, 퇴비 만들기 등도 품앗이가 많이 이뤄졌다. 같이 일을 함으로써 협업의 효과도 보고 동네 사람끼리 우의도 다졌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일손을 주고받는 것도 일종의 품앗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품앗이가 '준 만큼 받는다'는 식의 타산적 교환은 아니었다. 즉, 장정의 노동력을 빌렸다고 똑같이 갚아야 되는 건 아니다. 여성이나 아이들의 노동력으로 되갚는다고 불만스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의 부재로 일손이 부족한 집안을 돕는다는 뜻도 품고 있었다. 요즘은 품앗이하는 장면을 보기 어렵다. 품앗이를 할 만한 사람도 없지만, 노동의 대가를 돈으로 지불하는 방식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편리해지는 만큼 삭막해지는 게 세상이다.
"건넛마을 박주사네 딸이 신기가 있다네. 꽤 오래 앓는다 했더니, 결국 내림굿을…." 어른들이 흔히 주고받던 말이다. 과거에는 내림굿이 제법 흔했다. 별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거나 환청ㆍ환영에 시달리면 무병(신병)을 앓는다고 했는데 내림굿을 해야 나았다. 그렇게 내림굿으로 무당이 된 사람을 강신무(降神巫)라고 불렀다. 굿은 무당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신에게 기원하는 의식을 말한다. 보통 병을 고치기 위한 주술적 행위로만 알고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나라와 집안의 평안을 위해서나 조상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해 굿을 했고 풍년을 기원하기도 했다. 동네의 복을 비는 복굿, 비가 내리게 해 달라는 기우제굿도 있었다. 굿판이 벌어지면 동네 전체가 들썩거렸다. 굿은 춤ㆍ음악ㆍ연극ㆍ미술ㆍ문학이 한데 어우러진 종합예술이기도 했다. 한때는 무당을 혹세무민하는 사람들로, 굿을 타파해야 할 미신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당은 인간의 소망을 하늘에 전하고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내려 주는 메신저였을 뿐이다. 또 굿은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마당이었다. 무조건 죄인처럼 배척한 건 안타까운 일이다.
혼인이 그러하듯, 초상 역시 마을사람 모두가 함께 치르는 행사였다. 어디 어디의 누가 세상을 달리했다 하면 부르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장례절차가 척척 진행되었다. 예(禮)를 잘 알고 주선력이 있는 어른 하나가 호상을 맡아 상주를 돕고 장례를 이끌었다. 사실 지휘하는 사람이 없어도 모든 절차는 각본이 있는 것처럼 돌아갔다. 사내들은 마당에 차일을 치고 멍석을 까는 것은 물론, 가마솥을 걸고 나뭇짐을 져 날랐다. 아낙네들은 국을 끓이고 전을 부치고 밥을 안쳤다. 오케스트라처럼 정교하게 손발이 맞았다. 조금 과장하면 상주들은 곡을 하고 문상객만 맞으면 될 정도였다. 밤이면 마당에 화톳불이 놓아지고, 밤샘하는 사람들은 한쪽에서 투전이나 화투판을 벌이기도 했다. 발인을 하는 날이면 몇몇 사람은 산역을 위해 미리 장지로 가고 몇은 상여를 내어 정성껏 꾸몄다. 여인들의 애절한 곡을 뒤로하고 정든 집을 떠난 상여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장지로 향했다. 요즘은 농어촌에서도 장례를 병원이나 장례식장에서 치른다. 편한 세상인 건 분명한데 무언가 허전하다는 생각은 버리기 어렵다.
과거에는 길을 걷다가도 금줄이 보이면 절로 발이 멈춰졌다. 금줄은 부정한 것을 막기 위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걸어 매는 줄이다. 금줄의 안쪽은 성스러운 장소라는 걸 의미한다. 아기를 출산했을 때뿐만 아니라 서낭당처럼 신성한 곳임을 표시하는 곳에도 금줄을 쳤다. 또 가축이 새끼를 낳거나 장을 담글 때, 동제(洞祭)를 지낼 때도 금줄을 걸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맨 먼저 왼새끼를 꼬아 대문의 양쪽 기둥에 매달았다. 금줄이 걸린 집에는 동네 사람은 물론 가까운 친척도 21일(삼칠일) 동안 출입을 할 수 없었다. 금줄로 사람의 출입을 막는 것은 부정을 타지 말라는 주술적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항력이 약한 신생아를 질병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지혜이기도 했다. 사내아이를 낳았을 때는 금줄에 솔가지와 숯ㆍ빨간고추를 달았고, 여자아이일 경우에는 솔가지와 숯만 끼웠다. 고추를 단 것은 아들을 낳았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늘 푸른 솔가지는 생명을 상징하고, 숯은 부정을 물리치고 정결하게 한다는 뜻이 있다. 시골에 젊은이가 사라지고 도시에 아파트문화가 정착되면서 금줄도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삼가고 조심하기 위한 것'이라는 본래의 뜻만큼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호준 / <사라져 가는 것들, 잊혀져 가는 것들> 저자 |
추억하고 싶은 것들 3
추억하고 싶은 것들 - 한때는 ‘잘나갔던’ 지난 시절의 대표 업종들 | |
어린 시절엔 왜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았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양조장에 가서 술을 받아 오면서는 술맛이 궁금해 술주전자를 홀짝이기 일쑤였고,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라고 약장수가 외치는 곳이면 어떻게든 그곳을 기웃거려야 직성이 풀렸다. 뻥튀기 기계 앞에서는 또 어떻고. 언제 '펑' 터질지 몰라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귀를 막은 채 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던 재미는 남달랐다. 그때 우리들의 유년시절을 봄날처럼 따스하게 만들어 주던 그 풍경들, 그 가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1980년대 이전만 해도 웬만한 동네에 하나씩은 있던 대장간. 땅땅땅땅! 치익치익~ 대장장이가 쇠를 어르는 장면은 마술처럼 신기했다. 이가 빠지고 닳아서 못 쓸 것 같았던 낫이나 칼이 대장장이의 손을 거치면 날이 씽씽하게 선 새것이 되었다. 쇳덩어리가 온갖 도구로 변신하는 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가난한 시절의 상징이었던 전당포. 시대가 바뀐 요즘에는 명품 전용 전당포가 성업 중이라고. 아이를 업은 여자가 전당포 앞에서 서성거린다. 손가락에 자꾸 시선이 간다. 남편이 집을 떠난 지 벌써 여러 달이 되었다. 돈을 벌어 오겠다고 떠났지만 소식조차 없다. 아이가 며칠 전부터 열이 나고 아프다. 젖도 나오지 않는데 분유마저 떨어졌다. 망설이던 여자가 결심을 한 듯 전당포 문을 민다. 한참 뒤 나오는 그녀의 손에는 가락지가 없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약장수가 파는 약만 먹으면 못 낫는 병이 없을 것 같았다. 자아~ 자아~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떠돌이약장수는 5일장의 명물이었다. 장이라는 게 옷장수도 어물전도 없어서는 안 되지만, 떠돌이약장수가 빠지면 새알심 빠진 팥죽처럼 허전하기 마련이었다. 장날이면 떠돌이약장수들은 한쪽에 전을 펴고 현란한 말솜씨로 장꾼들의 발길을 잡았다.
막걸리는 시골 잔치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음식'이었다. 1960~70년대 양조장은 소위 ‘잘나가는 업종' 중 하나였다. 막걸리의 수요는 늘었지만 허가는 제한돼 있어서 독점의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아무리 가난해도 술이 없으면 판이 성립되지 않는 게 우리 민족이었다. 일을 하다가도 새참 때가 되면 막걸리타령이 절로 나왔다. 풋고추나 신 김치 한 점에 막걸리 한 잔 들이켜야 힘이 솟았다.
소금을 만드는 데는 바닷물과 햇볕 그리고 무엇보다 염부의 땀이 절대적이다. 소금을 만드는 과정은 땀과 기다림의 연속이다. 바닷물을 둠벙(저수지)에 가뒀다가 염도가 적당해졌다 싶으면 빛 좋은 날 넓은 밭(염전)으로 끌어올린다. 내리쪼이는 한여름의 햇살에 바닷물은 서서히 졸아든다. 결국 진득한 소금물이 되었다가 육각의 결정체로 태어난다. 그들이 모여 하얀 소금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펑' 소리는 무서웠지만, 아이들은 뻥튀기 기계 앞을 떠날 줄을 몰랐다.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던 시절에 뻥튀기야말로 최고의 군것질거리였다. 뻥튀기장수가 동네에 들어와 자리를 펴면 아이들은 엄마를 졸라 쌀이나 보리, 옥수수, 콩 등을 얻어 냈다. 아저씨에게 곡식자루를 내밀면 깡통에 받아 뒀다가 순서대로 뻥튀기 틀에 넣고 돌렸다. 기계가 어느 정도 가열되면 둥그런 망을 댄 뒤, 뻥이요~ 하고 외쳤다. 그러면 아이들은 귀를 막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잠시 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솟고 엄청나게 불어난 튀밥이 쏟아졌다.
이호준 / < 사라져 가는 것들, 잊혀져 가는 것들 > 저자 |
추억하고 싶은 것들 2
추억하고 싶은 것들 - 골목길의 일곱 가지 풍경 | |
우리 곁을 스쳐 가는 시간을 따라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는 우리들의 일상이었으나 이제는 빛 바랜 추억이 되어 버린 그 시절의 첫 페이지에 떠오르는 건 단연 골목길이다. 좁은 골목길은 그 당시 아이들에겐 세계의 전부였고, 해지는 줄도 모르고 뛰놀던 최고의 놀이공원이었다. 가난했지만 정겨웠던 그 옛날의 골목길, 그 길에 서면 잊고 지낸 지난 날의 꿈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올망졸망 ] 산 없애고 개천 메워서 수십 층 아파트만 세우는 요즘 ‘올망졸망'이란 단어는 잊은 지 참 오래다. 더욱이 이것을 집이 모여 있는 풍경에 쓰는 경우는 이제 ‘전설 따라 삼천리'에나 나올 법한 일이 되어 버렸다. 방 몇 개 크기의 아담한 집들이 사이좋게 어깨를 맞대며 작은 마을 하나를 만든다.
이런 장면은 언덕배기에 제일 잘 어울린다. 구릉이 많은 한국 지형에 순응하며 만들어 낸 조형성이다. 막 모인 것 같지만 나름 질서가 있다. 낮은 집이 앞에 스크럼을 짜고 그 뒤로 키가 조금 더 큰 집들이 도열한다. 햇빛을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나눠 갖는다. 보기에도 좋다. 축구선수들이 사진을 찍을 때도 이 대형이다. 앞줄은 뒷줄이 든든하고 뒷줄은 앞줄이 살갑다. 3층짜리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지만 밉지 않다.
[ 갈림길 ] 골목길의 공간적 특징을 들라면 ‘미로'이다. 미로는 풀라고 있는 것, 사람 사는 골목길이니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나름 규칙이 있는데 갈림길이 그 비밀이다. 갈림길은 미로를 만들지만 미로에 규칙성도 준다.
형이 동생을 데리고 즐거운 놀이 중이다. 앞에 있는 녀석이 형 명진이고 뒤 녀석이 동생 명성이다. 동생은 형 말을 잘 듣는다. 둘이 술래잡기를 하는 모양인데 "너는 괴물 해 나는 파일럿 할게"라는 형 말에 신나서 "응!" 한다. 형이 동생을 아끼는 마음도 유별나다. 연신 머리를 쓰다듬는다. 둘은 쫓고 쫓기고 난리를 치며 신나게 논다. 저 나이면 학원에 붙들려 가 있을 시간인데 용케 뛰어놀고 있다. 계단이 놀이터다. [ 휴먼 스케일 ] 요즘 집 밖에 나서서 내 몸에 견줄 만한 스케일을 만나기란 정말 힘들다. 사람 사는 집이 70층을 넘어서고 구청 수준에서 세계 최고층 건물을 짓겠다고 난리인 세상이다.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신문을 펼치 면 상가 광고라고 그린 그림에 사람은 끝없이 넓은 매장에 바글거리는 개미떼로 그려진다. ‘사람 머릿수=돈' 이외의 가치는 없다. [ 문 ] 바로 그 ‘파란대문'이다. 골목길 속의 청량제이다. 무채색이 많은 골목길에 악센트를 주고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색 요소이다. 주변에서 궁금해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새마을 운동 끝에 새로 이은 시골 슬레이트 지붕 가운데 유독 ‘파아란~' 색이 많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답은 ‘청량'과 하늘을 닮고 싶은 ‘코발트블루', 두 가지이다. 이 답은 이를테면 골목길 속 ‘파란대문'의 탄생의 비밀쯤 된다.
임석재 /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
추억하고 싶은 것들 1
추억하고 싶은 것들 - 그 옛날 우리들의 동반자였던 생활 소품들 | |
추억은 빛 바랜 사진 속에만 있지 않다. 가끔 사는 일이 힘들고 지칠 때 추억은 우리 곁에 다가와서 가만가만 등을 토닥여 주고 간다. 오랜만에 둘러앉은 형제들과 어린 시절의 잊혀진 시시비비를 다시 가리거나, 이제는 제법 나이 든 티가 나는 옛 친구들과 까마득한 학창시절을 얘기하다 보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 시절 우리 생활의 필수품이었던 것들에 대해 한 번쯤은 이렇게 경의를 표해도 좋으리라. 자~ 초등학교 때 쯤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딸랑 딸랑~ 딸그락 딸그락~ 하굣길의 빈 양은도시락 소리는 세월이 흘러도 엊그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다. 어려웠던 시절엔 도시락이 빈부를 가르는 상징이기도 했다.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한 아이들은 점심시간이 되면 슬그머니 나가 물로 빈속을 채웠다. 도시락 하나 채울 양식에 시래기나 나물을 넣고 끓여 온 가족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하던 때였다. 보릿고개는 늘 높고 꺼진 배는 늘 깊었다.
겨울이면 난로 위에 탑이 쌓였다. 도시락을 난로에 얹어 놓으면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밥이 눋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밑에 놓겠다고 다투기도 했다.
도시락은 옹기종기 둘러앉아 먹는 맛이 각별했다. 반찬이라야 김치ㆍ장아찌나 잘해 봐야 콩장ㆍ멸치볶음이었지만 왜 옆자리의 반찬이 더 맛있어 보이던지. 김치 국물이 배어든 책은 항상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에 흉이 될 것도 없었다. 급식시대인 지금,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타자기 하면 흰 블라우스에 단정한 치마를 입고 타이핑을 하는 여사무원이 연상된다. 어느 땐 경쾌한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타닥 타닥 타다닥…철걱철걱…. 잘 치는 타자 소리는 타악기 소리처럼 리듬이 있었다. 지금은 고물상 뒷방지기로 전락했지만 타자기는 한때 문서작성 도구의 총아였다.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라는 사실 역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타자가 그리 만만한건 아니었다. 수동타자기는 지우거나 저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틀리면 수정액으로 고치거나 처음부터 다시 쳐야 했다. 또 리본에 글쇠를 때려 글자를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에 자판이 깊고 무거웠다. 컴퓨터처럼 적당히 주물러(?)서는 글자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배울 땐 문서 하나 만들다가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서양에서는 타자기가 맹인을 위한 도구로 발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914년 이원익이 개발한 타자기가 최초였다. 그 뒤 1949년에 치과의사 공병우가 만든 '공병우 타자기'가 첫 실용 타자기가 되었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타자기도 시간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전동타자기와 워드프로세서에게 밀리더니 컴퓨터의 등장 이후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다. 요즘이야 쌀에서 돌을 골라내고 팔기 때문에 조리질을 할 일이 없지만 전에는 밥을 그냥 지으면 우지끈!! 돌을 씹기 일쑤였다. 그러잖아도 시원찮은 시아버지의 치아를 그렇게 망가뜨리면 며느리는 쥐구멍을 찾아도 모자랄 수밖에. 그래서 조리는 오랜 세월 부엌의 필수품이었다. 대조리가 세월 따라 플라스틱이나 철망으로 대체되는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고 복조리만 남았다. 복조리는 쌀을 일듯 복을 일고 오복(五福) 중 하나인 치아를 보호한다는 의미로 그리 부른다. 전엔 섣달그믐부터 초하루 새벽까지 “조리 사려~ 조리 사려~” 외치며 복조리 장수가 골목을 누볐다. 그러면 집집마다 조리를 몇 개씩 사서 방 귀퉁이나 대청ㆍ부엌 등에 걸어 두었다. 복을 깎는 거라 해서 복조리 값은 깎지도 않았고, 무를 수도 없었다. 조리는 산죽(山竹)을 엮어서 만든다. 대를 삶아 말려 껍질을 벗긴 뒤 잘게 쪼개서 물에 담갔다가 엮는다. 쌀을 담는 ‘바구니' 부분은 움푹하게 엮으며 쥐기 좋도록 자루를 만든다. 요즘도 복조리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나마도 중국산에 밀린다고 한다. 세월이 무상함을 새삼 안타까워할 뿐이다.
“1에 7이요… 3에 8이요….” 주산시간에 선생님이 숫자를 불러 주는 소리는 특유의 가락이 있었다. 주판은 긴 세월 동안 계산기의 대명사였다. 주산교육이 본격화되기 시작된 1960년대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1980년대까지 등굣길에 주판을 들고 가는 아이들은 드물지 않았다. 저학년 교실에서 또각또각 나던 소리는 고학년 교실로 갈수록 따다다닥 따르르… 듣기 좋게 바뀌었다.
상업고등학교에서는 주산이 정규과목 중 하나였다. 주산을 잘하면 은행 같은 금융기관에 수월하게 들어가 부모들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다. 나라에서도 주산을 특기교육의 하나로 장려하여 1960년대부터 정부검정을 실시했다.
‘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이른 아침 대문가를 얼쩡거리던 이웃집 오줌싸개의 얼굴이다. 전에는 아이들이 오줌을 싸면 키를 머리에 씌워 ‘소금을 얻으러' 보냈다. 소금이 목적이 아니라 오줌 싸는 버릇을 고치려는 어른들의 암묵적 공조였다. 이웃집 문 앞에서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엄마가 소금 얻어 오래요” 하면 부지깽이를 들고 나와 키에 탁! 탁! 매질을 한 다음 싸르륵 싸르륵~ 소금을 뿌렸다.
키는 콩ㆍ팥ㆍ들깨 같은 곡식을 잔돌이나 티끌과 분리시키는 도구다. 보리를 절구에 찧은 다음 껍질을 날려 버릴 때도 키질을 했다. 키에 곡식을 한 바가지 놓고, 아래위로 까불면 가벼운 껍질이나 먼지는 날아가고, 잔돌과 쭉정이는 키 앞머리로 간다. 결국 필요한 알곡만 움푹 파인 뒤편으로 몰리게 된다.
키는 껍질을 벗긴 버드나무가지나 산죽을 엮어 만든다. 옛날 천시받던 고리백정들이 만들어 팔던 품목 중 하나기도 하다. 크기나 모양은 지방이나 만드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가운데가 움푹 파이고 날개가 달린 건 거의 비슷하다. 요즘도 시골길을 지나다 보면 키질하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하지만 머지않아 추억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게 틀림없는 풍경이다.
등잔만큼 오래 이 땅의 백성들과 친숙하게 지내 온 물건도 드물 것이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밤을 밝히는 거의 유일한 도구였다. 그 불빛 아래서 밥도 먹고 새끼도 꼬고 글도 읽었다. 등잔은 그 자체가 훌륭한 스승이었다. 아무리 심지를 돋워도 어느 정도 이상의 빛을 내주지 않고 그을음만 뿜어냈다. 과도함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진리를 그렇게 가르쳤다. 어쩌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그 정도의 빛이 적절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야 별도 제대로 반짝이고, 반딧불도 소중해지는 게 아닐지.
어머니들은 그 불빛 아래서 거침없이 바느질을 했다. 시아버지 두루마기도 시어머니 적삼도 아이들 옷도 만들었다. 바늘귀에 실이 잘 안 꿰어지고 땀이 고르지 못하면 눈이 어두워진 걸 한탄했지 불빛 탓을 하는 일은 없었다. 아이들도 그 등잔 아래서 숙제를 하고 연도 만들고 딱지도 접었다. 공책의 글자는 제법 반듯했고 연도 하늘을 훨훨 날았다. 아이들이 자지 않고 오래 놀고 있으면, 어른들은 성화였다 “기름 닳는다. 어서 불 끄고 자거라.” 등잔기름마저 귀한 시절이었다. 전기가 방방곡곡에 불을 밝히는 지금, 그 어디에서도 등잔불을 보기 어렵다. 적절한 어둠이 주던 안락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호준 / 서울신문 뉴미디어국 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