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29. 08:23

詩가 있는 일상 3

[詩가 있는 일상] 강에 가서 말하라

"황인숙은 독신에다 전업 시인인데, 전화를 잘 받지 않고 휴대전화도 없는 그녀와 통화를 하기란 무척 어렵다. 누군가가 얼마나 일방적으로 쓸모없는 이야기를 쏟아 부었으면 온갖 희로애락이 통신망을 통해 전달되는 요즘 같은 세상에 들어앉아 이런 시를 썼을까…."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사고한다니…

하루에도 몇 번씩 불쑥불쑥 잡념이 끼어든다. 날씨가 무더워 정신이 느슨해졌기 때문인가 보다.

늘 이성이 강조되곤 하는 인간의 사고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인지과학자들의 주장이 맞는 걸까. 그 때문에 예부터 면벽참선이니 화두니 정진이니 하는 말이 있어 왔던 걸까. 한순간에 정신이 육체나 분위기에(이깟 더위에!) 지배당하기도 하는 것으로 봐서 ‘이성은 우리의 동물적 본능을 초월하지 않고 이용'하며, ‘몸에서 유래한 이성은 몸을 초월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주장에 점점 힘이 실린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 그다지 절망스럽지만은 않다. 남들이 다 꿰뚫고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모르고 사는 것이 더 무섭다. 그런 한편 아직도 나는 자신의 결점을 인정하는 게 괴롭고, 누군가에게 지적당하는 순간이 곤혹스럽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끼긴 한다. 남의 능력은 인정해 줄수록 내 마음이 편하고, 나의 결점을 빨리 인정하면 할수록 열등감이 극복되는 기분이다.

가끔은 도저히 개성을 인정해 줄 수 없는 사람을 만난다. 남에게 거침없이 요구하는 바로 그 점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임을 자신만 모르는 종류의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목소리가 우렁차고 에둘러 말할 줄 모르며, “솔직하게 말해서”를 연발하면서 남의 염장을 지른다.  

그들의 드센 기를 꺾으려면 목소리가 기차 화통은 되어야 하고, 같은 말을 백 번 해서라도 그들을 응징하겠노라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하고, 끝내 그 철벽을 무너뜨리지 못해도 절망하지 않을 만큼 담대해야 할 것이다. 그걸 감수할 사람이 없으니 그들은 무법천지에서 살고 있다.

함께 사는 질서를 무시하는 자들이 밤늦게 전화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며 온갖 불만을 꾸역꾸역 뱉어 내는가 하면, 타인에 대한 정보도 거르지 않고 쏟아 놓는다. 그것은 결코 올바른 소통 방식이 아니다.

그런 전화를 받기 싫어 밤이면 전화 코드를 뽑아 놓기도 하지만, 그들이 남을 낚는 기교와 구실은 참으로 다양해서 그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도 힘들다. 혼자 사는 사람이, 특히 혼자 사는 여자가, 전화를 성실하게 받지 않는다면, 그 같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쉽게 배설하지 말라

 '강'을 보는 순간 나는 대번에 그 시가 왜 쓰여졌는지 알아차렸다. 황인숙은 독신에다 전업 시인인데, 전화를 잘 받지 않고 휴대전화도 없는 그녀와 통화를 하기란 무척 어렵다. 누군가가 얼마나 일방적으로 쓸모없는 이야기를 쏟아 부었으면 온갖 희로애락이 통신망을 통해 전달되는 요즘 같은 세상에 들어앉아 이런 시를 썼을까…
 


                                          *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내게도 가끔 황당한 전화가 걸려 온다. 한 번은…, 집에 중환자가 있어서 밤늦게 울리는 전화에 병적으로 예민해 있을 때 걸려 왔다. 가족들은 서로 그 점을 헤아려 급히 연락할 일이 있어도 기다렸다가 아침에 연락을 하곤 하던 때였다.

신경이 곤두서 늦게 잠들었던 나는 전화의 첫 번째 신호음이 채 다 울리기도 전에 깜짝 놀라 눈을 떴고, 정신없이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전화기 저편의 목소리가 대뜸 말했다.
“접니다.”

나는 전화 속 목소리를 기억해 내려 애썼다. 그런데 횡설수설하는 말을 듣자니 그는 만난 적이 없을뿐더러 전화로도 인사를 나눈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제법 시를 잘 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떤 이유로도 그 시간에 내게 전화해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확신한다는 투로 “접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불쾌감에 잠을 설친 다음날 피곤한 상태로 생각해 보니 언젠가 내가 신문 문화면에 그의 시를 소개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가 새벽에 남의 집에 무작위로 전화를 해대는 무례한 사람임을 소문을 통해 알고 있었음에도 무시당했다는 기분은 지워지지 않았다.


꼭 위로의 말을 듣지 않아도…
 

다시 한 번 찬찬히 '강'을 읽어 보니 웃음이 나온다. 황인숙 시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사람이다. 늘 만나면 재잘재잘 사람을 웃기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몇 권 낸 그녀의 재미있는 산문집을 읽으면서도 나는 막연히 그 점을 느꼈다. 재미있는 그녀의 글을 읽고 난 후 느껴지는 묘한 갈증은 그 때문인 것도 같다.

그런 사람에게 누군가의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까지 떠벌렸을 사람을 생각하면, 그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을 그녀를 생각하면, 안 웃을래야 안 웃을 수가 없다.

황인숙 시인은 문단에서 꽤 기인으로 통한다. 그녀는 늘 약속시간에 늦게 선물꾸러미를 들고 나타난다. 나타나서는 자신이 양손에 바리바리 들고 온 짐에 치였노라며 신경질을 바락바락 낸 후 꾸러미를 풀기 시작하는데, 그 속에서는 별의별 게 다 나온다. 심지어는 노란 때수건까지.

감수성이 뛰어난 시인이되 현실감각이 없다는 것은 그녀가 다른 사람을 위로할 때 느껴진다. 가끔 그녀가 내게 하는 위로의 말을 듣고 있으면 ‘지금 이 사람이 나를 약 올리고 있는 건가?' 싶을 만큼 위로의 초점이 늘 조금씩 어긋나 있다. 드디어 나는 혼자 앉아 큰 소리로 웃고 만다. 전화를 해서 떠벌렸던 사람은 과연 듣고 싶던 위로의 말을 그녀로부터 듣기나 했을까?


- 조은 / 시인.
              시집으로 <무덤을 맴도는 이유>ㆍ<따뜻한 흙>이 있으며, 산문집 <벼랑에 살다>,
              장편동화 <햇볕 따뜻한 집>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