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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8. 1. 08:28

위기를 극복한 기업가 3

[위기를 극복한 기업가] 루이스 거스너, 거대 공룡 IBM을 뛰게 하다

50년 후에도 글로벌 Top 10을 유지할 수 있는 기업으로 꼽히는 IBM. IBM도 탄탄대로만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IBM은 1980년대 부실해진 기업 체질을 성공적인 기업혁신으로 극복하고 재도약함으로써 21세기 가장 주목할만한 기업으로 재탄생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위기극복과 재도약을 이끈 인물은 2002년 세계 최고의 CEO로 뽑혔던 IBM의 전 CEO 루이스 거스너(루이스 V. 거스너 Jr)다. ‘위기 해결사' 루이스 거스너에게 위기를 극복하는 경영전략을 배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 가장 존경받는 기업

경제계에는 이름만 들어도 그 묵직함이 느껴지는 기업들이 있다. 국내에서라면 ‘삼성'이라는 브랜드가 그러할 터다. 눈을 세계로 돌려 보자. 경제전문지 포천(Fortune)이 매년 선정하는 500대 기업 1위에 오른 유통업체 월마트나, 10위권에 탄탄하게 이름을 올린 도요타자동차, GE 같은 기업들은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할 만큼 위상이 대단하다.

올해 500대 기업에서 46위를 기록한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 역시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엄청나다. 오히려 현재의 명성은 과거에 비하면 다소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1914년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이 설립한 IBM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에 속해 있으면서 또한 ‘가장 중요한 기업'이라고 평가 받았다. 이른바 ‘베스트 오브 베스트(Best of Best)'였던 셈이다.

 

IBM은 컴퓨터 등 디지털 사업 기술표준을 선도했고, 정형화된 복장규정과 생활규칙, 최고의 복리후생 등 일류 기업으로서의 문화를 자랑했다. 1980년대 초반에는 각종 언론이 꼽은 ‘가장 존경 받는 기업'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렸다.


IBM에 찾아온 위기, 과거의 성공에 안주하다 변화를 못 읽다

그런데 이렇게 1등 자리를 절대로 내놓지 않을 것 같던 IBM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그 징후는 뚜렷했다.

먼저 각종 재무 수치가 안 좋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매출 성장률이 한 자릿수로 둔화됐고 1986년에는 40년 만에 처음으로 순이익이 감소했다.

조직이 비대해지면서 의사결정이 늦어지고 생산성이 떨어지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다. 1980년대 들어 169개 국가에 자회사를 거느리게 됐고 40여만 명의 종업원이 일하는 ‘공룡' 기업이 됐지만 1인당 생산성은 경쟁기업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또 메인 프레임 중심에서 개인용 컴퓨터로 급속히 전환되는 컴퓨터의 시장환경도 IBM에는 불리했다.

 

문제는 정작 IBM이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과거의 성공에 안주해 ‘별일 있겠느냐'는 식의 안일함에 빠진 것이다. 매출과 이익이 감소하고 있었지만 워낙 경쟁사들에 비해 덩치가 크다 보니 줄어드는 정도를 체감하지 못했고, 소비자들의 IBM에 대한 인식도 나빠지고 있는데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더구나 정보기술이 혁명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인데도 소프트웨어와 마이크로프로세스 칩의 중요성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응용프로그램은 마이크로소프트(MS)에게, 마이크로프로세스 칩은 인텔(Intel)에게, 프린트는 엡손(EPSON)에게 외주를 주는 등 핵심부품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심지어 PC마저도 컴팩(Compaq)과 애플(Apple)의 성장을 허용했다. 그러면서도, 시장 규모는 줄어들고 있는데 과거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형 컴퓨터에만 집착하는 오류를 범했다.

회사가 이런 상황에 이르니 눈치 빠른 인재들은 빠져나갔고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직원도, 활기차게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직원도 없었다. ‘미국의 보배'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IBM은 주요 언론으로부터 ‘사망선고'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컴퓨터 문외한 루이스 거스너의 등장

뒤늦게 위기를 깨달은 IBM 경영진은 새로운 최고경영자(CEO)만이 해결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새롭게 조타수를 잡게 된 이가 루이스 거스너였다. 그는 컴퓨터업계와는 무관한 제과업체 나비스코의 CEO였다.

그러나 그는 쓰러져 가는 나비스코를 살려 낸 구원자였다. 나비스코는 1989년 무리한 기업확장으로 290억 달러(약 29조 원)이라는 빚을 지고 있었지만 루이스 거스너는 이를 절반으로 줄여 냈고, 1992년도에는 1989년 이후 3년 만에 흑자를 냈다. 이에 앞서 맥킨지 근무시절에는 미국의 유명 철도회사를 회생시키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루이스 거스너는 ‘위기 해결사'로서의 명성을 IBM에서도 계속 이어 나갔다.

29조 원의 빚더미에 올라앉아 쓰러져 가던 제과업체 나비스코를 불과 3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회생시킨 위기 해결사 루이스 거스너.
그는 사상 초유의 위기에 직면하여 회생 가능성마저 회의적이었던 IBM을 구원할 유일한 CEO로 선택되었다.
(사진 : 매일경제신문 DB)


위기극복법 1. 수입을 늘리기보다 나가는 비용을 줄이다

루이스 거스너의 첫 번째 작업은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난 비용을 줄이는 것이었다. 실제로 조사를 해보니 IBM의 매출액 대비 비용지출 규모는 다른 경쟁사들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비용을 줄이고자 정부 관련 사업 등 이익에 기여하지 못하는 자산을 팔아 버렸고 고정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빌딩 등 부동산도 대폭 줄여 1993년부터 1997년까지 4년간 2500 평방피트(ft²) 이상의 부동산을 처분했다.

대규모의 인력 구조조정도 단행됐다. 1993년 초 30만 명이 넘어섰던 직원을 연말에는 25만 명으로, 1994년에는 20만 명대로 30% 이상 줄였다.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루이스 거스너는 “한 번 크게 얻어맞는 것이 떨어지는 물방울을 계속 맞는 고문보다 덜 고통스럽다”며 직원들의 이해를 구했다. 루이스 거스너의 비용 줄이기 프로젝트는 1993년부터 1997년까지 매년 50억 달러의 비용을 줄이는 효과를 냈다.

위기극복법 2. 변화에 민감한 기업문화를 만들다

잘되는 기업에 가면 넘치는 활기를 느낄 수 있지만 망해 가는 기업을 보면 직원들의 눈빛은 흐리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루이스 거스너는 IBM 직원에게서 후자의 모습을 봤다.

루이스 거스너는 채찍과 당근 정책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긴장감을 불어넣고 주인의식을 고취시켰다. 사진은 뉴욕 암몽크(Armonk)에 위치한 IBM 본사.
(사진 : 매일경제신문 DB)

이 같은 무사 안일한 태도를 버릴 수 있도록 종신고용정책부터 폐지해 버렸다. 개혁 프로그램에 호응하지 않는 사조직과 파벌도 없앴다. 임원들에게는 철저하게 결과 중심으로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 제도를 시행했다. 회사 기여도를 평가할 때도 상사가 일방적으로 점수를 매기는 방식에서 동료 6인이 익명으로 평가하는 방식을 택해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웃고 칭찬하는 분위기 속에서 결론 없이 끝났던 회의문화도 긴장감 속에 의사결정을 내리는 방식으로 바꿔 버렸다. “회의를 위한 회의는 필요 없고, 장황한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으니 회사에서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터놓고 얘기하자”며 발표자의 프로젝트 플러그를 뽑아 버린 일화도 유명하다.

채찍뿐 아니라 당근도 있었다. 과거 고위 임원에게만 부여하던 자사 주식보유 제도를 일반 사원들에게도 확산시켜 주인의식을 갖고 이익을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위기극복법 3. 소비자 중심으로 다시 변화하다

루이스 거스너는 미국의 대표기업이었던 IBM이 소비자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결국 기업의 성패는 소비자에게 달렸다는 점을 되새기며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하고 인정받기 위한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업무 시간의 40% 이상을 고객과 함께 보냈는데, 고객과 더 가까이 있겠다는 의미로 집무실을 고객이 많은 뉴욕으로 옮겼다. 지역별 영업조직을 금융, 여행, 보험 등 산업별 영업조직으로 개편한 것도 고객 서비스 질을 높이기 위한 정책이었다.

고객에게 단순 기술을 파는 게 아니라 사업의 문제에서 해법을 제시하는 토털 솔루션을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로터스 디벨롭먼트(Lotus Development Corp.) 등 관련 회사를 인수하기도 했다.

루이스 거스너는 고객에게 토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로터스를 인수하여 사업군을 다각화했다. 사진은 2008년 로터스 퀵커(Quickr) 서비스 시연회. (사진 : 매일경제신문 DB)


흑자 전환과 함께 옛 명성 되찾다

결과적으로 루이스 거스너의 개혁은 성공을 거뒀다. 1993년 순손실이 81억 달러였던 IBM은 그의 부임 1년 만에 순이익 30억 달러로 돌아섰다. 필자도 참석했던 1995년 라스베이거스 컴덱스(COMDEX)에서 그는 기조연설을 맡으며 IBM의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1997년에는 모든 사업이 흑자로 전환했고 2000년 순이익은 80억 달러를 넘어섰다. 무엇보다 하드웨어라는 저성장 사업에서 소프트웨어, 서비스, 솔루션 등으로 방향을 전환하며 고성장 사업으로 기업을 이끌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변화에 잘 대처해야 한다는 것만이 경영진리다”

IBM의 사례에서 보았듯 당장 ‘잘나가는' 듯 보이는 기업도 예외 없이 위기의 순간을 맞는다. 또 위기는 위기인지 아닌지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소리 없이 찾아온다. 때문에 늘 위기가 올 수 있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21세기에 들어 위기극복의 키워드는 변화를 얼마나 잘 수용하느냐의 여부인 듯하다. 이는 리더와 구성원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다.

“경영전략이 무엇이냐는 의미가 없다. 이 세상은 변화한다는 것, 그 변화에 잘 대처해야 한다는 것만이 경영진리다.”
중국에서 인터넷사업으로 거부의 반열에 오른 잭 마(Jack Ma) 알리바바닷컴(www.alibaba.com) 회장의 이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명순영 / 매경이코노미 기자

2008. 8. 1. 08:19

위기를 극복한 기업가 2

[위기를 극복한 기업가] 비난 딛고 미국의 상징으로 우뚝 선 록펠러의 힘

미국의 석유왕이자 최고의 부자였던 존 데이비슨 록펠러. 하지만 그는 생존해 있는 동안 끊임없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석유산업을 평정하는 동안 편법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록펠러는 대중의 질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을 뿐만 아니라 자선사업가로 변신함으로써 오늘날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록펠러는 그의 잘못을 통해서, 또 그의 선행을 통해서 우리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 


록펠러, 악덕기업가와 자선사업가의 사이

록펠러의 전기를 읽다 보면, 한 사회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어떤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가를 똑똑히 배울 수 있다. 록펠러는 부를 이뤄 가는 과정 내내, 그를 향해 덤비는 언론ㆍ대중과 맞서야 했다.

1839년에 태어나서 1937년에 사망한 존 데이비슨 록펠러(록펠러 1세)는, 앤드류 카네기와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가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늘 '악덕기업가'란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온갖 편법을 통해 사업을 확장하고 부를 축적한 까닭에, 그의 돈은 '더러운 돈'이라는 사회적 인식도 강했다.

그렇게 악덕 기업가였던 그가 오늘날 존경받는 부자로 기억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가로 꼽히는 존 데이비슨 록펠러. 그는 미국의 석유를 독점하며 한때 악덕기업가란 악명을 얻기도 했지만, 그가 가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오늘날에는 위대한 자선사업가로 칭송받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남북전쟁과 오일러시를 거치며 석유왕이 되다

록펠러가 활동하던 시기는 미국에서 막대한 부와 산업이 만들어지던 때로,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도금시대> (1873년)에서 ‘부자들이 거들먹거리는 시대'라고 묘사하기도 하였다. 같은 시대에 활동하던 부자들은 밴더빌트, 굴드, 피스크를 들 수 있다.

1861년 4월에 시작된 남북전쟁은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에게 사상 최악의 날벼락이었지만, 그런 혼란의 시기에도 한몫을 톡톡히 챙기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횡재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록펠러 역시 동업자와 함께 세운 클라크 앤드 록펠러 사에 군수물자 주문이 쇄도하면서 더 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종자돈을 모으는 데 성공을 거둔다.

록펠러가 성공을 거둘 무렵 미국은 곳곳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석유산업이 붐을 이룬다. 석유에서 ‘미래'를 발견한 록펠러는 정유소 운영 등의 경험을 거쳐 1863년에는 동업자 클라크ㆍ앤드류스와 함께 정유공장을 운영하게 된다. 이 공장은 클리블랜드 최대의 정유공장으로, 2위 업체의 2배인 하루 500배럴의 정유능력을 갖고 있었다.

 확장시대에 편승하여 록펠러는 자신이 가진 모든 돈과 에너지를 퍼부어 사업을 키우게 된다. 바로 이 회사가 훗날 미국의 석유생산으로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스탠더드오일 사의 원조가 된다.

석유산업이 발전하는 데는 미국 철도의 힘이 컸다. 록펠러는 철도회사에 뇌물 증여 등을 통해 경쟁사의 석유 운송을 방해하기도 했다. 이런 편법 때문에 록펠러는 대중과 언론으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았다. 

1878년 미국 전체의 정유능력이 연간 360만 배럴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록펠러 소유의 스탠더드오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330만 배럴이나 되었다. 그는 1880년에는 다른 회사를 합병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경쟁사들을 물리치고 미국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90∼95%를 손에 쥐게 되었는데, 역사상 이처럼 절대적인 독점권을 확보한 기업가는 전무했다. 석유의 생산ㆍ정유ㆍ판매를 담당하던 스탠더드오일 및 계열사들은 1882년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란 이름으로 통합된다.


대중의 따가운 비난과 지탄에 직면하다

록펠러에게 위기는 사업상의 위기보다는, 스탠더드오일 사가 성장하면 할수록 커지는 대중과 언론의 반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점에 있었다. 1888년이 되면서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는 모두 40개의 기업을 산하에 거느리게 되는데, 이 가운데 14개 기업이 완전 독점 상태에 있었다.

문어발식으로 확장을 거듭하는 스탠더드오일 사를 두고 뉴욕주 상원위원회는 “이 나라의 상거래시스템에 번져 가고 있는 질병”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물론 록펠러가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이 아주 신사적이지만은 않았다. 경쟁사들을 압박해서 하나하나 무너뜨리는 것에 대해 혹자는 비열한 방법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돈을 버는 과정이 결코 천사와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1890년대가 되면 스탠더드오일은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 최강의 기업이자, 뻗어 가는 미국의 힘을 상징하는 기업이 된다. 하지만 록펠러는 사업가로서 격렬한 지탄과 오명의 주인공이 된다. 록펠러는 사업 초기부터 여론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서 거액에 해당하는 수천만 달러를 들여서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노력하면 할수록 여론과 언론은 더욱 나쁜 쪽으로 록펠러와 스탠더드오일 사를 받아들이게 된다.

당시 록펠러를 향한 여론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는, 그의 교회 헌금 이야기가 적격이다. 1905년 초 보스턴에 모인 교회 목사들은 해외선교회에 기부된 10만 달러를 자연스러운 찬송과 감사 기도로 기꺼이 받  아들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헌금이 록펠러의 지갑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지자 노기에 찬 웅성거림이 예배당을 가득 채우고, 급기야 한 목사가 장로들에게 ‘더러운 돈'을 당장 돌려보내라고 요구하기까지 한다. 목사가 이 정도의 분노를 표현할 정도였으니, 시중의 록펠러에 대한 여론은 '칼 든 강도' 정도였을 것이다.

록펠러의 돈은 '더러운 돈'으로 인식되어 교회 목사들이 록펠러의 헌금조차 거부할 정도였다.

위기 극복법 1 _ 폭풍우에 맞서기보다 돌부처의 평정심을 유지하다

어떤 사회든지 간에 부에 대한 관점이 제대로 정립되기까지 대중, 언론, 정치 그리고 기업가들 사이에 극적인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사회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반전시킬 것인가는, 결국 기업가 자신의 판단과 믿음에 달려 있다.

록펠러는 사회의 거센 비판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그는 대중의 질투와 시기심을, 시대를 앞선 사람들이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비용 정도로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때로는 지나치게 냉정하게 보이는 그의 대처방식은, 싸움을 걸어오는 수많은 사람들과 기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기업인들보다 장수할 수 있도록 도와준 힘이었다. 한 친구가 그에게 스탠더드오일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공격을 언급하자 록펠러는 "내가 그걸 문제 삼으면 주의를 환기하게 될 거고, 무시해 버리면 곧 사라질 걸세"라고 답하였다.

하지만 록펠러를 향한 언론의 공격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청문회에 서야 했다. 록펠러는 이때도 자신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실어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로 일관했다.

하지만 그것은 록펠러의 전략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상황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보다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가 말을 아낀 것은 훗날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기 극복법 2 _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

여론의 폭풍우가 조금씩 멈출 무렵, 록펠러는 보통의 기업가들과 달리 자선사업에 힘을 쏟는다. 자신의 가문과 기업에 쏟아진 대중과 언론의 질투ㆍ시기심을 장기적으로 희석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결국 이 방법은 록펠러의 의도대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게 된다. 다시 말해 그와 가문에 대한 오명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록펠러가, 그와 같은 시대에 각종 편법으로 미국 최대의 철도 재벌로 발돋움한 밴드빌트(1794~1877)와 다른 점은, 사치에 돈을 쏟아 붓지 않고,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과 증오를 자손들에게 더 이상 물려주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는 데 있다. 그를 통해 독점기업가의 위치에서 역사에 남는 자선사업가로 새롭게 자리매김했을 뿐만 아니라, 고통받는 인류를 돕는 선인으로 자신을 바꾸었다.

1910년 뉴욕의 <아메리칸> 지는 지난 20년 동안 기부금 총액을 “앤드류 카네기 1억 7,930만 달러, 존 록펠러 1억 3,427만 1,000달러”로 비교해서 보여 주었다. 카네기의 자선에는 언제나 자기 과시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록펠러의 자선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그는 오랜 기간에 걸쳐 침례교회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하였고, 시카고대학의 재건과 관리에도 큰 힘을 보탰다. 1910년까지 그가 시카고대학에 기부한 돈은 4,500만 달러에 달할 정도로 거액이었다.

록펠러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더러운 돈'이라는 오명이 붙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고통받는 인류를 위해 아낌없이 썼다는 데 있다.
록펠러센터가 있는 뉴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한번 록펠러를 기억하는 이유이다.

 록펠러는 100살 가까이 장수한 덕분에 자신에게 쏟아지던 비판이 서서히 존경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 자신이 좋아하는 말 ‘모든 재난을 기회로 바꿔라'를 몸소 실천에 옮긴 덕분이었다. 록펠러재단, 록펠러센터, 록펠러의학연구소 등만 봐도 그것이 너무나 잘 드러나지 않는가.


- 공병호 /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2008. 8. 1. 08:16

위기를 극복한 기업가 1

[위기를 극복한 기업가] 강철왕 카네기, 그에게 위기는 도약의 무대였다

역사를 통해 위대한 기업가로 평가받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시련과 고통에 침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기회 삼아 더 높은 도약을 했다는 것.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앤드류 카네기다. 고향 스코틀랜드를 등지고 새롭게 정착한 미국 사회는 그에게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위기의 순간마다 창의적인 경영 수완을 발휘함으로써 마침내 아메리칸 드림을 넘어 세계의 '강철왕'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카네기를 찾는 이유는, 불확실성 시대의 삶을 살고 있는 직장인들에게 또 기업인들에게 그가 하나의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위대한 인간으로의 승리, 미국의 대부호 카네기

'강철왕'으로 불리는 앤드류 카네기(1835.11.25~1919.8.11)는 세계 경영사에 찬란히 빛난 북극성이자 전설로 통한다. 그는 인생의 역경들을 극복하고 미국의 철강산업을 발전시킴으로써 미국을 세계 최강의 슈퍼파워로 만드는 기반을 닦았다.

또한 자선사업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에 걸맞은 사회적 책임을 실천함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기에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

1835년 유럽 스코틀랜드에서 가난한 베틀직공의 아들로 태어난 카네기는 1848년 가족과 함께 미국 피츠버그로 이민을 가 면직물 공장 공원, 전보 배달원, 전신기사로 일하다가 펜실베이니아철도회사에 입사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데다 이재에도 밝아 고속승진을 거듭하던 카네기는, 미래에는 철과 강철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고 예견하여 1865년 철도회사를 나와 키스톤브리지 사를 설립ㆍ경영하면서 자신의 꿈을 펼친 끝에 세계 최고의 철강회사를 일궈 냈다.

카네기는, 남북전쟁 후 격변기를 보내던 미국 사회와 경제의 변화 흐름에 적응하면서 성공을 거둔 전반기와, 평생 '악덕기업주' 꼬리표를 달게 된 홈스테드 파업 사건 이후 자선사업에 헌신한 후반기를 통해 84년에 걸친 인생의 씨줄과 날줄을 튼실하게 엮었다.

강철왕 카네기.
그는 경제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의 철강산업이 세계 최고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을 닦았으며,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자선사업을 통해 기업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 (사진 : 연합뉴스)

 

 창조경영과 과감한 합병으로 성공가도 질주

세계경제와 미국경제가 격변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기업 경영자들은 고난을 피할 수가 없었다. 카네기는 기업가로서 맞은 이 첫 번째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꾸는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했다.

당시 미국경제는 남북전쟁(1861~1865) 이후 제조업 발전의 필요성이 커진 상황이었고, 철과 전력의 활용과 함께 과학의 발전 및 잇따른 발명 등 다양한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는 시기였다. 1860년 이전에 미국 내 특허권 인정은 3만 6,000건이었으나, 1890년까지 30년 동안에 44만 건의 특허권이 부여될 정도로 급성장을 거듭했다.

전신, 전화, 타자기, 계산기, 현금출납기, 자동식자기, 백열등, 축음기 등이 속속 발명됐고, 동시에 미국의 기간산업인 철강산업은 고율의 관세 보호를 받고 성장을 지속했다.

카네기는 급변하는 경제상황 속에 제조비용을 줄이고 능률을 높이는 세부 생산비용 회계처리 방식과 미국 제철업계 최초로 염기성 평로를 도입한 데 이어, 철강 원료를 제공하는 코크스 광산과 철 광산뿐 아니라 원료품들을 공장으로 수송할 배와 철도를 구입해 생산성을 높였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철강산업은 국가 기간산업으로서
고효율의 관세 보호를 받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때 카네기는 경영방식을 과감히 개선하는 한편, 광산을 사들이고 배와 철도를 구입하여
생산성을 높임으로써 거침없는 성장을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적절한 시점에 투자에 성공했고, 발상의 전환과 창의적인 경영으로 다른 경영자들이 고전할 때 거침없이 사업 확장을 강행하여 결국 세계 철강계를 제패했던 것이다.

이같은 수직적 결합은 훗날 독점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당시로서는 최첨단에 속하는 대단한 경영 수완이었고 결국 미국 제조업계에 큰 이정표를 세웠다. 강철왕은 이렇게 탄생했고, 세계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게 되었다.


노조 탄압 악명 딛고 자선사업으로 기업사의 새 장 개척

두 번째 위기는 바로 미국경제 사상 최악의 노동파업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홈스테드 파업이었다. 1872년 미국 최대의 카네기 철강회사 홈스테드 제강소를 세웠던 카네기는 4,000명의 비숙련 노동자들을 휴일 없이 하루 12시간씩 혹독하게 일을 시키고 일주일에 9달러만을 줬다. 그러나 그는 평상시 노동자들과 친숙하게 지낸 원만한 성격 탓에 그다지 나쁜 평가는 받지 않았다.

사건은 1892년 6월 카네기 철강회사가 잇따른 인수합병으로 경쟁업체가 사라지고 큰 폭의 이익을 냄에 따라 노조가 임금인상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노조파괴 전문가로 불린 동업자 헨리 클레이 프릭은 미국 노동총연맹(AFL) 산하의 금속ㆍ주석 노조의 지원을 받는 노조파괴 계획을 세운 뒤 카네기와 협의 끝에 오히려 임금 삭감을 단행, 노조측을 자극했다.

프릭은 7월 초 공장폐쇄와 함께 공장 주변 3마일에 가시 철조망을 치고, 300명의 사설 경비원을 고용해 공장을 요새화시켰다. 분노한 노동자의 공세와 시민들의 합세로 사설 경비원들이 노동자들에게 포위되자, 프릭은 공권력 개입을 유도하기 위해 협상을 끝까지 거부했다.

결국 파업 95일 만인 10월 13일 주지사 로버트 패티슨이 8,000명의 군대를 파견했고, 전투를 방불케 하는 유혈충돌 과정에서 10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프릭이 노동자들을 향해 실탄 사격을 지시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악화됐던 사태는 결국 군에 의해 강제 진압됐다. 프릭의 노조 탄압에 동조했던 카네기는 이후 노동조합을 해산시켰고 미국 철강 분야의 노동운동은 이후 쇠퇴를 거듭했다.

이후 카네기 철강회사는 1900년에는 생산량이 설립 당시보다 10배로 늘었고 매출은 20배 이상 증가했다. 미국 철강산업의 4분의 1을 차지한 카네기가 생산하는 철강의 양은 1890년에 벌써 당시 세계 최강국인 영국 전체에서 생산되는 철강량을 능가했다.

결국 노조 해산에 성공하고 기업경영은 순조로웠으나 카네기는 이후 악덕 자본가의 표상으로 꼽히게 됐고 길거리를 지날 때마다 손가락질과 수근거림을 감내해야 했다.

평생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데 대해 고민을 거듭하던 카네기는 이후 자선사업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는 54세 때인 1889년 한 잡지에 기고한 '부의 복음(The Gospel of Wealth)'이라는 기고문에서 "재산을 안고 지구의 품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천국에서 명패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부는 재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해야 한다"며 부의 사회환원이 부자의 신성한 의무임을 강조했다.

결국 그는 1901년 회사를 JP모건의 유나이티드스테이츠철강회사에 2억 5,000만 달러에 매각하고 경영현장에서 은퇴한 채 자선사업에 전력하며 '제2의 인생'을 개척했다.

그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여러 영어권 국가에 수많은 공공도서관을 설립하기 위해 기부금을 내놓았고, 1900년 카네기멜론대학교 내 카네기 공과대학, 1902년 워싱턴 카네기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앨라배마 주 터스키기 연구소를 적극 후원했다.

 가난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소년은 마침내 미국에서 가장 위대하고 누구보다
부러울 것 없는 철강왕이 되었고, 그가 가진 것을 다시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위대한 인간이 되었다. 사진은 한 철강회사 공장.
 

그가 1911년 설립한 뉴욕 카네기재단은 거액을 들여 미국ㆍ영국ㆍ캐나다 등지에 2,500개의 도서관을 건립, 지역사회의 구심적 역할과 함께 세계 문화의 부흥에 기여토록 했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카네기의 경영 행보는, 전쟁터처럼 치열한 기업 경쟁의 현장에서 위기에 매몰되거나 침몰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의미 있고 창의적인 해법을 꾸준하게 추구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경영 수완과 무한한 창의력을 가진 부자들은 자신의 부를 나누어 주는 방법과 기술도 창안해 내야 한다.

만약 그들이 가난이 무엇인지 안다면 경험에 의해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는 방법도 알고 있을 것이므로 가난한 자들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다" 며 다른 기업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창의적인 방식으로 기업인들의 사회적 역할에 선구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 Good To Great > 의 저자인 짐 콜린스 스탠포드 경영대학원 교수는 '위대한 기업'의 4대 조건으로 성과(Performance), 영향력(Impact), 명성(Reputation), 지속성(Longevity)을 들었다.

카네기가 꾸준히 발상의 전환과 창의적 노력을 기울였기에 미국의 철강업은 오랜 기간 세계를 제패했고, 콜린스의 지적처럼 그의 자선활동으로 미국 기업들은 악덕기업에서 선행을 베푸는 기업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위기와 과오를 또 다른 도약과 기회의 무대로 만들어 낸 카네기의 인생은 그래서 다시 되돌아보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 글

김홍국 / 뉴시스 정치부장, <미국의 거장들> , <세계건축가 100인 한국건축가 100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