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29. 08:20

詩가 있는 일상 4

[詩가 있는 일상] 빗물의 언어, 스스로 부서져 풀 한 포기라도 피우는…
 

"무지개는 비 속에 잠재해 있는 극단의 아름다움이다. 물론 비 속에는 풍요, 광란, 사랑, 인내, 질서, 무질서, 얼음, 불, 심지어 폭력의 이미지까지 들어 있다. 모든 대상이 극단을 향해 치달을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삶을 통해 더 나은, 더 아름다운 세계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존재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서로 다른 친구

오랜만에 우리 집에 손님이 왔다. 어려서부터 알고 지낸 손님과 나는 열네 살 차이가 난다. 큰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우리는 서로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면 반드시 ‘친구'라고 한다. 낡고 작은 한옥에서 부대끼며 사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평생을 넉넉하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친구는 자신이 번역한 따끈따끈한 신간 두 권을 놓고 갔다. 일찍이 그녀는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 미시간에 가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왔을 정도로 학구적인데다 자태가 우아하다. 그녀의 지성은 늘 매력적으로 발산돼 조용히 다녀도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반대로 나는 너무도 평범해 눈에 띄는 행동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녀는 나를 통해 서민들의 삶을 배우고, 나는 그녀를 통해 상류층 사람들의 삶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나는 작년부터 집 옆 구민체육센터에 다니고 있고, 그녀도 집 근처 스포츠센터에 다니고 있다. 내가 가끔 체육관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면 그녀도 자신이 다니고 있는 스포츠센터에서 일어난 해프닝을 말해 주곤 한다. 한 번은 발목 아래까지 내려오는 모피 코트를 입고 왔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옷을 도둑맞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로서는 잃어버렸다는 옷의 가격부터가 놀라웠다.

“그래서, 끝내 그 옷을 못 찾았어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옷을 잃어버린 사람도 자신이 정말로 그 옷을 입고 왔는지 아닌지 헷갈려 하더라. 그런데 씨씨티비 때문에 옷을 찾았어.”
“거긴 탈의실에도 씨씨티비를 설치해 둬요? 그럼 벗은 몸을 다 보는 거잖아요.”

친구는 소리 없이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럴 리가 있니. 출입문에 설치된 카메라로 눈에 띄는 그 옷을 걸치고 나가는 사람을 가려냈고, 들어올 때와 나갈 때 옷이 다른 것도 알아냈지. 그런데 그 사람, 늘 딸과 함께 운동하러 다니는 사람이야. 자식이 보는 데서 그런 짓을 하는 사람도 있더라.”

그녀는 곧 떠날 여름휴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휴가 계획이 없는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 덮인 히말라야와 피라미드, 티티카카와 바이칼, 자작나무 숲과 백두산 천지를 생각했다.


시 속으로 들어오는 일상

광화문 근처에 있는 우리 집은 좁지만 아늑하다. 봄이면 대문 안으로 경희궁공원의 아카시아 꽃잎이 날아와 소복 쌓이고, 가을이면 금화처럼 동글동글한 나뭇잎이 발자국 소리를 내며 굴러 온다. 우리 골목의 몇몇 집들은 경희궁공원과 담장을 공유하고 있다. 담장 이편은 개인 집 마당이고 저편은 경희궁공원 뒷마당이다. 어떤 집에서는 아예 그 담에 쪽문을 내서 마당에서 곧바로 경희궁공원 뒤뜰로 들어가 운동을 하거나 숲을 거닌다.

울창한 경희궁공원 숲 덕분에 집을 비우면 참새들이 실내로 들어왔다 가기도 하고, 배가 등가죽에 붙은 어미 고양이가 어린 새끼를 데리고 와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기도 한다. 가끔 먹이를 줬던 고양이 한 마리가 생각난다. 그 고양이는 사람들이 놓은 약을 먹고 우리 집으로 와서 여섯 시간 만에 죽었다. 죽음은 처절했다.

짧은 생애 동안 우리 집이 그나마 가장 편안했던지 회귀하는 연어처럼 기를 쓰고 찾아와 녀석이 죽어가는 동안,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몇몇 사람들은 녀석의 죽음을 액운 운운하며 섬뜩해 했지만, 나는 죽어가는 한 생명이 찾아올 수 있었던 공간의 너그러움이 느껴져 그들의 말에 동요되지 않았다. 그런 일들은 오래 되새김질한 뒤에 시가 되기도 한다.

평소에는 대문을 잘 열어 두지 않지만 폭우가 쏟아지면 가끔 대문을 열어 놓는다. 골목을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데다 거추장스럽게 우산을 쓰고 남의 집을 넘보는 위인은 없을 테니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하루 종일 내리꽂히는 비를 보고 있으면 비로소 비의 언어를 이해한 듯한 기분이 되곤 하는데, 그것은 시를 쓰는 내겐 큰 수확이다.

                                         * 조은

저렇게 몸이 부서져야
풀 한 포기라도 꽃피울 수 있으리라
저렇게 몸이 나락에 닿아봐야
뿌리 있는 것들의 우매함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또
저렇게 번개 치고 광기로 흘러넘쳐야
먼 곳까지 꽃피우며 흘러갈 수 있으리라

제 몸을 허공에다 한 순간의 무지개로
내거는 것도 아름다우리
  

자신의 삶을 통해 더 아름다운 세계를 일깨우는 것들

무지개는 비 속에 잠재해 있는 극단(너무도 짧다는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이다. 물론 비 속에는 풍요, 광란, 사랑, 인내, 질서, 무질서, 얼음, 불, 심지어 폭력의 이미지까지 들어 있다. 모든 대상이 극단을 향해 치달을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삶을 통해 더 나은, 더 아름다운 세계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존재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한 번은 황동규 시인과의 대화 중에 “조은 씨는 아직도 그 집에 사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한 후 이어지는 정적이 어색해서 말을 이었다. “제 능력으로는 제 집을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관에 담겨야만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나는 그 말을 하자마자 꾸중을 들었다. 대학에서 정년퇴임해 쉬고 있는, 그야말로 선생님 앞에서 ‘관' 운운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솔했다는 후회가 깊어진다.

그 일이 있기 전, 우연히 교보문고에서 황동규 시인과 다른 두 명의 시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교보빌딩 1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우리들을 데려가 커피를 사 주었다. 청년처럼 호기심이 많은 그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시에 대해 말했고, 나는 문단의 한참 선배인 그의 열정과 확신이 부러웠다.

황동규 시인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소설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이고, 나의 아버지는 소시민이라, 그는 나의 사회적 기반이 무척 아슬아슬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고, 아니나 다를까 “조은 씨는 정말 독종이군요!” 했었다.

그런 일도 있었는데 ‘관' 운운했으니 지난 이미지를 쇄신하기는커녕 한술 더 뜬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이다. 반성만 하면 삶은 뒷걸음질 친다. 반성도 삶의 에너지가 될 만큼만 하는 것이 현명할 터, 나는 지금의 나를 고무줄처럼 과거로 끌어당기는 지독한 반성이라는 덫에는 걸리지 않을 것이다.


- 조은 / 시인.
   시집으로 <무덤을 맴도는 이유>ㆍ<따뜻한 흙>이 있으며, 산문집 <벼랑에 살다>, 장편동화 <햇볕 따뜻한 집>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