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하고 싶은 것들 2
추억하고 싶은 것들 - 골목길의 일곱 가지 풍경 | |
우리 곁을 스쳐 가는 시간을 따라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는 우리들의 일상이었으나 이제는 빛 바랜 추억이 되어 버린 그 시절의 첫 페이지에 떠오르는 건 단연 골목길이다. 좁은 골목길은 그 당시 아이들에겐 세계의 전부였고, 해지는 줄도 모르고 뛰놀던 최고의 놀이공원이었다. 가난했지만 정겨웠던 그 옛날의 골목길, 그 길에 서면 잊고 지낸 지난 날의 꿈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올망졸망 ] 산 없애고 개천 메워서 수십 층 아파트만 세우는 요즘 ‘올망졸망'이란 단어는 잊은 지 참 오래다. 더욱이 이것을 집이 모여 있는 풍경에 쓰는 경우는 이제 ‘전설 따라 삼천리'에나 나올 법한 일이 되어 버렸다. 방 몇 개 크기의 아담한 집들이 사이좋게 어깨를 맞대며 작은 마을 하나를 만든다.
이런 장면은 언덕배기에 제일 잘 어울린다. 구릉이 많은 한국 지형에 순응하며 만들어 낸 조형성이다. 막 모인 것 같지만 나름 질서가 있다. 낮은 집이 앞에 스크럼을 짜고 그 뒤로 키가 조금 더 큰 집들이 도열한다. 햇빛을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나눠 갖는다. 보기에도 좋다. 축구선수들이 사진을 찍을 때도 이 대형이다. 앞줄은 뒷줄이 든든하고 뒷줄은 앞줄이 살갑다. 3층짜리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지만 밉지 않다.
[ 갈림길 ] 골목길의 공간적 특징을 들라면 ‘미로'이다. 미로는 풀라고 있는 것, 사람 사는 골목길이니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나름 규칙이 있는데 갈림길이 그 비밀이다. 갈림길은 미로를 만들지만 미로에 규칙성도 준다.
형이 동생을 데리고 즐거운 놀이 중이다. 앞에 있는 녀석이 형 명진이고 뒤 녀석이 동생 명성이다. 동생은 형 말을 잘 듣는다. 둘이 술래잡기를 하는 모양인데 "너는 괴물 해 나는 파일럿 할게"라는 형 말에 신나서 "응!" 한다. 형이 동생을 아끼는 마음도 유별나다. 연신 머리를 쓰다듬는다. 둘은 쫓고 쫓기고 난리를 치며 신나게 논다. 저 나이면 학원에 붙들려 가 있을 시간인데 용케 뛰어놀고 있다. 계단이 놀이터다. [ 휴먼 스케일 ] 요즘 집 밖에 나서서 내 몸에 견줄 만한 스케일을 만나기란 정말 힘들다. 사람 사는 집이 70층을 넘어서고 구청 수준에서 세계 최고층 건물을 짓겠다고 난리인 세상이다.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신문을 펼치 면 상가 광고라고 그린 그림에 사람은 끝없이 넓은 매장에 바글거리는 개미떼로 그려진다. ‘사람 머릿수=돈' 이외의 가치는 없다. [ 문 ] 바로 그 ‘파란대문'이다. 골목길 속의 청량제이다. 무채색이 많은 골목길에 악센트를 주고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색 요소이다. 주변에서 궁금해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새마을 운동 끝에 새로 이은 시골 슬레이트 지붕 가운데 유독 ‘파아란~' 색이 많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답은 ‘청량'과 하늘을 닮고 싶은 ‘코발트블루', 두 가지이다. 이 답은 이를테면 골목길 속 ‘파란대문'의 탄생의 비밀쯤 된다.
임석재 /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