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28. 11:08

신화 다시 읽기 4

누가 문화 경쟁력의 길을 묻거든 ‘신화’를 읽게 하라!

아이들이 읽는 책들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최소한의 교양을 갖추기 위해 읽어야 할 책들의 분야가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존경받는 인물의 일대기를 통해 삶의 역할모델을 찾는 데 도움을 주는 위인전, 아름다운 심성과 사회성을 함양하는 데 좋은 동화, 상상력과 모험심을 기를 수 있는 판타지소설…. 그렇다면 신화는? 만화로 된 <그리스 로마 신화>는 아이들 사이의 스테디셀러가 아닌가.

유럽을 여행할 때 마주치는 건물의 장식이나 그림의 상당수가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 중에도 신화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다. 게임ㆍ애니메이션ㆍ소설ㆍ연극 등의 문화산업도 신화를 끊임없이 재생하고 있다. 이제 신화를 알아야 하는 이유, 짐작되시는가. 


신화는 어떻게 문화의 원천이 되었는가

심리학자 칼 융(Carl G. Jung)은 원시 인류가 경험했던 태초의 사건은 무의식 속에 원형으로 각인되고 다시 그 원형들이 모여 집단무의식을 이룩하는데 이 집단무의식이 신화의 주요 내용이라고 하였다. 원시 인류의 욕망과 꿈이 담긴 신화 즉 집단무의식은, 수천 년의 시간이 흘러도 매 시기마다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나타날 뿐 그 본질 내용에는 변함이 없다.

이렇게 보면 신화는 문화의 원천이므로 우리가 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면 근본적으로 신화를 꼭 알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서양문화를 깊이 알기 위해서는 서양신화의 대표격인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동양문화를 깊이 알기 위해서는 동아시아대륙의 신화인 중국 신화에 대한 조예가 있어야 한다.

가령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도출된 인류의 본성에 대한 몇 가지 가설들은 오늘날의 서양문화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문화를 설명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잘못해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의 신화에서 유래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제 잘난 맛에 여인들의 구애를 거절하다가 벌을 받아 자기애에 빠져 꽃으로 변신한 나르키소스의 신화에서 나온 나르시시즘 등은 잘 알려진 가설들로서 오늘날에도 문학ㆍ예술 등의 문화현상을 해석하는 데 더없이 긴요하다.

 

이제 신화를 통해 후대의 철학ㆍ사상ㆍ문학 등을 읽어 봄으로써 신화의 인류 문화에 대한 근원적 지위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


동서양의 세계관이 다른 게 신화 때문이라고?

하늘ㆍ땅 등 세계의 창조, 인간의 탄생 등에 대한 이야기인 창조신화에는 인류의 근본적인 사유가 많이 담겨 있어서 후세의 철학과 문학 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태초에 지구가 혼돈 상태에 있었다는 신화는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다. 가령 중국 신화에서는 형체 없이 어둑어둑했다고 하고, 제주도 무가에서는 하늘과 땅이 뒤섞여 사방이 캄캄했다고 하며, <성경>에서는 혼돈과 어둠이 태초의 세계를 지배하였다고 말한다. 다시 중국 신화에서는 혼돈 속에 밝은 기운과 어두운 기운 두 가지가 뒤섞여 있다가 이것이 나중에 구분되면서 하늘과 땅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중국 신화의 이러한 내용은 나중에 동양철학의 유명한 우주론인 태극(太極) 이론으로 발전한다. 태극은 우주의 근본을 설명하는 도상인데 빨강과 파랑 부분은 혼돈 속의 두 가지 기운, 즉 양기와 음기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창조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신화로는 '시체화생설(屍體化生說)'이 있다. 거인이 죽고 그 시체가 분해되어 산ㆍ강ㆍ흙ㆍ초목ㆍ금석 등으로 변했다는 이 신화 역시 동서양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중국 신화에서는 거인 반고(盤古)가 혼자 살다 죽은 후 절로 몸이 세계로 변화되었다고 하고, 게르만 신화에서는 큰 신 오딘이 거인 이미르를 죽여 그 몸을 잘라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며, 바빌론 신화에서는 마르둑 신이 거대한 여신 티아마트를 싸움 끝에 죽인 후 토막을 쳐서 세계를 창조했다고 한다.

동서양의 이 거인창조신화들은 대체로 내용이 비슷한 것 같지만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차이가 있고 이 차이는 동서양 세계관ㆍ문화의 차이를 반영한다.

첫째, 동양의 거인 반고는 자연사임에 반하여 서양의 거인들은 피살된다. 이것은 동양에서의 자연론적인 사고와 서양에서의 변증법적인 사고를 반영한다. 사물은 자연의 도리에 따라 저절로 변화한다는 생각과 외부의 충격이 있어야 그 반응으로 발전한다는 생각, 즉 동서양 세계관의 차이를 신화는 일찌감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동양의 거인 반고는 죽은 후 몸이 그대로 통째인 상태에서 각각의 세계 요소로 변화하지만, 서양의 거인들은 모두 토막이 난 상태에서 변화한다. 이것은 동양의 전일적ㆍ총체적 사고와, 서양의 분석적 사고의 차이를 반영한다.


전설로, 소설로, 신화의 모티프는 끊임없이 재현된다

인류 재탄생의 시조가 된 중국의 복희(伏犧) 여와(女?) 남매의 결혼 신화가 후대의 전설과 문학에 어떻게 원형적으로 작용했는가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잘 알려져 있듯이 복희와 여와 남매는 대홍수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자 극적으로 살아 남아 나중에 결혼하여 인류의 대를 잇게 된다.

이 신화에서 중요한 요소는 홍수와 근친상간의 모티프이다. 물은 생식ㆍ생명을 상징하는데 홍수는 물의 과잉상태이다. 이 과잉상태는 생식능력인 성의 과잉상태, 즉 근친상간과 상관된다.

조선시대에 충주 지방에서 유행한 ‘달래강 전설'의 내용은 이렇다. 부모 없이 고아가 된 두 남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여름날 밭으로 가다가 소나기를 만난다. 소나기를 맞아 옷이 흠뻑 젖어 몸의 곡선이 드러난 동생을 뒤에서 보고 오빠는 성적 욕망을 느끼게 된다. 말도 안 될 일이라고 자책감에 시달리던 오빠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비극적인 전설이다.

다시 황순원의 국민소설 <소나기>를 보자. 잘 알다시피 마치 오누이 같은 두 소년 소녀가 개울가에서 만나 호감을 느낀다. 함께 놀다가 소나기를 만난 후 스킨십(?)이 이루어질 정도로 친해졌는데 소녀가 그만 병에 걸려 죽고 만다는 내용이다. ‘달래강 전설'과 <소나기> 모두에서 물의 과잉과 성적 과잉 즉 물과 에로티즘의 신화적 모티프가 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화산업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원, 신화에 있다

신화는 단순히 문화의 원형에 그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내용의 상상력으로 변형되어 현대 문화산업에서 적극적인 기능을 한다. 오늘날 게임ㆍ애니메이션ㆍ만화ㆍ영화 등 이른바 문화산업은 부가가치가 높은 선진국형 산업으로서 향후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유망한 분야로서 주목받고 있다.

예컨대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 '쥬라기 공원' 한 편의 수입이 당시 1년 동안 한국에서 자동차 수출해서 벌어들인 돈과 맞먹었다는 속설은 문화산업의 고부가가치를 웅변하는 비유로 자주 회자된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문화산업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자원이 신화를 비롯한 옛날이야기이다.

현재 성공적으로 문화산업을 수행하고 있는 나라들이 어떻게 신화 자원을 활용하고 있는지 당장 확인할 수 있다. 판타지영화 대작 '반지의 제왕'은 옥스포드 대학의 고전학 교수 톨킨이 지은 소설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이 작품은 게르만 신화에 근거한 것이다.

 

실의한 이혼녀를 단숨에 세계적 거부로 만들어 준 <해리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롤링은 불문학 전공자로서 서양의 중세 마법이야기를 각색해서 소설을 썼는데 소설뿐만 아니라 판타지영화로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밖에도 게임 분야에서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주로 켈트 신화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선진국 일본은 어떠한가? 일본의 문화산업은 자국의 전통 이야기인 요괴담을 활용하여 만화와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부동의 최고 지위를 누리고 있다. 수년 전에 출시된 애니메이션 대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바로 옛날부터 내려오는 요괴담과 요괴 그림을 소재화하여 성공한 케이스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소재가 된 요괴 그림.   

이 모든 사례들을 종합할 때 이제 우리는 신화가 황당하고 케케묵은 옛날이야기라는 인식과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신화는 인류의 본질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자 문화의 원천이기도 하면서, 현재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수도 있는 소중한 자원인 것이다.

- 정재서 / 이화여자대학교 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