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28. 11:11

신화 다시 읽기 3

본래 신화의 주인공은 여신이었다? 신화 속 여신의 모습에서 진정한 여성리더의 모습을 발견하라.

신화에 등장하는 것은 남신만이 아니다. 주인공은 오히려 남신이 아니라 여신이었을 것이라고 신화학자들은 말한다. 신화 속에서 남신과 여신의 역할을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남신들이 전쟁이나 살육 같은 파괴적인 일을 수행하는 데 비해, 여신들은 생산을 담당하고 아픈 곳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신의 모습을 오늘날 많은 여성 리더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당하면서도 따뜻한 리더십, 그들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신화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여신, 잃어버린 여성의 자존심과 능력
 

신들의 세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대부분 남신들이다. 가령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의 최고신이 제우스이고 중국 신화에서의 가장 큰 신이 황제(黃帝)인 것처럼. 그러나 신화학자들은 본래 신화에서의 주인공은 여신이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인류 사회의 최초 형태는 모계사회였고 여성이 중심이었다. 모계사회는 씨족의 큰 할머니를 우두머리로 삼고 여성 씨족원으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이 시절에 섬겼던 최고의 신은 당연히 여신이었을 것이다.

둘째, 인류 초창기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력이었다. 특히 농업 생산력은 인류의 생존을 좌우하는 관건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생식 숭배가 성행하여 여성의 생식능력, 땅의 생산능력 등이 숭배되었고 이에 따라 땅과 여성의 생식ㆍ생산능력을 동일시한 땅의 여신, 즉 대지모신(大地母神)이 신앙의 중심에 있게 되었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에서 초기 원시시대에 주도권을 쥐었던 신들은 여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고의 지위를 누렸던 여신들이 남신들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것은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 즉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로 인류 사회가 변천하면서부터이다. 이때 여신들은 과거의 독립적인 위치에서 남신들에게 종속된 위치로 격하된다.

 가령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의 헤라ㆍ아프로디테 등은 원래 제우스와는 별개로 각 지역을 대표하는 여신들이었으나 그리스 로마 신화가 남신 중심으로 다시 편성되면서 각각 최고신 제우스의 아내 혹은 딸로 변신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여신은 남신에게 종속되어 있다. 이 천장화를 봐도
여신은 남신 제우스의 사랑의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중국 신화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뚜렷하다. 가령 여와(女?)는 세상을 창조한 고고한 지위의 여신이었으나 나중에 남신 복희(伏犧)의 누이동생으로 변모하며, 서왕모(西王母) 역시 곤륜산(崑崙山)의 고유한 여신이었으나 후일 동왕공(東王公)이라는 남신의 아내로 신분이 바뀐다.

오늘날 여성학에서는 이러한 여신 지위의 변화에 주목한다. 여신을 우리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인식이 투영된 존재라고 가정하면, 신화 속 여신은 가부장제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여성 본디의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신화 속의 여신으로부터 잃어버린 여성의 자존심과 능력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동양의 여신,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여신을 말하라 하면 흔히 헤라라든가 아프로디테(비너스) 등 서양 여신을 먼저 머리에 떠올릴 정도로 그리스 로마 신화는 우리에게 상식이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서양 여신들처럼 귀에 익숙한 여신들이 있었다. 한 세기 사이에 우리는 자신의 신화를 거의 잊고 만 것이다.

헤라와 아프로디테만큼이나 유명하고 인기 있었던 동양의 여신들에 대해 알아보자. 그녀들은 창조와 생육의 여신 여와와 죽음과 생명의 여신 서왕모이다.

인간을 빚고 결혼제도를 만든 창조의 여신, 여와(女)

여와는 태초부터 있었던 위대한 여신이었다. 아득한 옛날 여와는 지상에 초목과 동물만 있는 것을 보고 인간을 만들 생각을 하였다. 그녀는 진흙으로 정성스레 사람을 빚었다. 그랬더니 그것들이 저절로 움직여 돌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지상에 사람이 가득 차자 여와는 사람 빚기를 멈췄다. 그러나 만들어 놓은 진흙 인간이 죽어 버리면 그 다음이 문제였다. 여와는 인류의 대가 끊기지 않도록 남녀가 결혼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은 중매의 여신이 되었다.  

 사람과 짐승이 평화롭게 더불어 살던 어느 날 지구에 큰 변동이 왔다.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 뚫려 불덩어리가 쏟아져 내리고, 땅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여와가 기껏 만들어 놓은 인간들은 살 수가 없다고 아우성이었다. 자비심 많은 여와는 오색의 돌을 찾아 그것들을 잘 다듬어 하늘로 가지고 올라가 뚫어진 곳을 기웠다.

다음에 여와는 거대한 자라 한 마리를 잡아 네 개의 발을 잘랐다. 자라의 넓고 큰 몸을 지탱해 온 그 발들은 튼튼해서 무거운 것을 괴기에 좋았다. 여와는 네 개의 자라 발을 땅의 네 귀퉁이에 세워 대지를 안정시켰다. 이제 사람들은 불덩어리 세례를 받지도 않고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지도 않게 되었다.

여신 여와가 오색의 돌을 다듬고 있다. 구멍 뚫린 하늘을 막기 위해서였다. 여와는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을 위해 끝까지 헌신했다.

 이렇게 여신 여와는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을 위하여 끝까지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시 평화롭게 사는 것을 보고 여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불사약을 지닌 죽음과 생명의 여신, 서왕모(西王母)

 서왕모는 여와보다 좀 늦게 출현한 여신이다. 서왕모는 대륙의 서쪽 끝에 있는 곤륜산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마귀할멈 같은 무서운 생김새에다 전염병과 형벌 등을 맡아보는 살벌한 여신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불사약을 지닌 아름다운 생명의 여신으로 신의 성격이 바뀌게 된다. 그것은 죽음과 관련된 여신이면 생명도 주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서왕모는 요지(瑤池)라는 호숫가에 궁궐을 짓고 살았고 반도원(蟠桃園)이라는 복숭아나무 밭을 가지고 있었다. 반도원의 복숭아는 한 개만 먹으면 1만 8,000년까지 살 수 있다고 했다. 언젠가 동방삭(東方朔)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몰래 들어와 몇 개를 훔쳐 갔는데 그는 아주 오래 살아 ‘삼천갑자 동방삭'이라는 말을 남겼다.

곤륜산에 하강하는 서왕모. 처음에는 전염병과 형벌 등을 맡아보는 여신이었지만, 나중에는 불사약을 지닌 생명의 여신으로 변모한다.

임금이든 영웅호걸이든, 많은 사람들은 서왕모가 불사약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만나 보고 싶어했다. 주(周) 나라의 목왕(穆王)은 서쪽으로 여행을 한 끝에 마침내 곤륜산에 도달하여 서왕모를 만났고 큰 환대를 받았다. 둘은 사랑에 빠져서 주목왕은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잊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했다는 급보를 접하고 주목왕은 서왕모와 애끊는 이별을 하였다. 주목왕은 돌아온다고 약속하였지만 결국 둘은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서왕모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인기 있는 여신이었다. 허난설헌(許蘭雪軒) 같은 여류시인은 특히 서왕모를 좋아해서 그녀에 관한 주옥 같은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여성은 의존적ㆍ종속적이 아니라 독립적ㆍ창조적 존재

동양의 두 여신이 오랜 세월 사랑을 받아 온 것은 이들의 속성에 변하지 않는 의미와 가치가 있어서일 것이다.

여와 신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여성의 창조와 치유 능력이다. 일반적으로 신화에서 남신이 전쟁ㆍ살육과 같은 파괴적인 일을 수행한다면 여신은 생식ㆍ생산과 같은 창조적인 일과 더불어 파괴된 것을 치유ㆍ보완하는 일을 담당한다.

여와는 인류를 창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지속되도록 결혼제도를 만들고 깨어진 자연을 재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그녀 개인의 독자적인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여와 신화로부터 여성이 본래는 의존적ㆍ종속적이 아니라 독립적ㆍ창조적 존재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여와 신화가 여성의 사회활동에서의 주체적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면 서왕모 신화는 내면적 영역에서의 깊은 잠재력을 보여 준다. 서왕모가 불사약을 지녔다는 사실은 그녀가 생명의 원천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서왕모는 모든 사람이 찾아가서 다시 힘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는 생명의 샘과 같은 존재이다.

인간에게는 자기가 태어난 자궁 혹은 고향 같은 곳으로 돌아가 쉬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는데 이것을 모태회귀(母胎回歸) 본능이라고 한다. 여성에게는 독립적ㆍ창조적 능력과 더불어 마치 자연과도 같이 만물을 품에 안고 편안히 휴식을 취하게 해 주는 포용의 힘이 있다. 서왕모는 천주교에서의 성모 마리아와 불교에서의 관음보살처럼 우리에게 안식을 주고 궁극적으로는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여신이었던 것이다.

여와와 서왕모 신화가 보여 주는 여성의 원초적인 모습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재현될 필요가 있다. 항상 창조적인 자세로 당당하게 활동하는, 그러면서도 따뜻한 자애로 모든 것을 감싸 안는 포용력을 지닌 여성 리더라면 현대에 새롭게 태어난 여신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 정재서 / 이화여자대학교 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