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28. 11:13

신화 다시 읽기 2

우리도 영웅의 길로 갈 수 있다!

신화를 읽다 보면 자주 영웅들을 만난다. 그들은 나라를 세우기도 하고, 비범한 능력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신처럼 완벽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들 보통사람처럼 중요한 순간에 실수하고 사소한 일에 흥분하는가 하면, 곳곳에 도사린 함정을 피하지 못하고 종종 고난에 빠진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들이 겪는 현실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그러니 영웅을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다. 우리들 마음속을 잘 다스리면 우리도 조금은 영웅의 길에 가까이 갈 수 있으리니…. 


영웅, 뛰어난 능력을 지녔지만 결함도 많다

신화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있다. 가령 창조신화는 태초에 이 세계와 인류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고, 영웅신화는 영웅이 모험과 투쟁 끝에 보물을 얻거나 나라를 세우는 이야기이며, 자연신화는 태양ㆍ달ㆍ별 등의 천체와 비ㆍ바람ㆍ우레 등의 기상 현상을 신격화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창조신화와 자연신화의 주역은 초월적인 신들로서 완전히 인간을 뛰어넘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지만, 영웅신화의 주역은 말 그대로 영웅으로서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지만 결함도 있는 인간이다. 바로 이 점이 영웅신화의 매력이다.

영웅은 신처럼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결함이 있음에도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신적인 경지에 까지 이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집을 나서서 악당과 싸우고 괴물을 퇴치하여 나중에 공을 이루고 돌아오는 영웅의 행로는, 사회에 나가 험한 세파에 시달리면서 성장해 나가는 우리네 인생살이와 근본적으로 닮아 있다.

우리가 영웅신화를 읽거나 들을 때 깊이 공감하고 재미있어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동전을 던지면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속설로 유명한 로마 트레비 분수.
신화 속 주인공들에게서 신격보다는 인간다움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헤라클레스, 신과 운명의 횡포에 도전하다

동서양에는 수많은 영웅신화가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영웅신화의 예를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서양의 영웅신화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헤라클레스 신화이다. 최고신 제우스와 인간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스
 는 무적의 힘을 지닌 영웅으로 유명하다.

그는 갓난아기 적에 독사를 잡아 죽였고 성장해서는 사자를 잡아 그 가죽을 머리에 쓰고 다녔다. 그러나 제우스의 정처(正妻) 헤라의 증오에 의해 광기가 발작하여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속죄를 위해 미케네의 에우리스테우스 왕이 제시한 12가지 난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12가지 난제란 머리가 아홉 개 달린 히드라와 같은 괴물을 죽이는 것, 금뿔이 달린 숫사슴이나 식인 암말 같은 동물을 생포해 오는 것, 여왕의 허리띠나 황금사과와 같은 보물을 가져오는 것, 지옥을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개를 끌고 오는 것 등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일들이었다.

제우스와 인간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스. 서양신화 최고의 영웅으로 꼽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을 죽이는 등의 수많은 고난을 겪었다. 

이 모든 일들을 헤라클레스는 군말 없이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또 다른 모험을 겪는다.

가령 황금사과를 얻으러 코카서스를 지나가게 될 때 인류에게 불을 갖다 준 죄로 형벌을 받고 있던 프로메테우스를 풀어 주고, 식인 암말을 데리러 가는 도중에 자신을 환대해 준 아드메토스 왕을 위해 죽음의 신과 씨름하여 이미 죽은 왕비를 무덤에서 구해 오기도 한다.

이후 그는 데이아니라라는 여자와 재혼하게 되는데 그녀는 헤라클레스가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갖지 않도록 마인(馬人) 켄타우로스의 피를 바른 옷을 그에게 입혔다.

예전에 켄타우로스가 데이아니라를 희롱하다가 헤라클레스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그가 죽어 가면서 데이아니라에게 자신의 피가 남편이 한눈팔지 못하게 하는 사랑의 묘약이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사실상 켄타우로스의 피는 맹독이어서 헤라클레스는 결국 중독되어 죽고 만다. 그러나 죽어서 하늘로 올라간 헤라클레스는 헤라와 화해하고 그녀의 딸 헤베와 결혼하여 올림푸스의 신이 된다.

헤라클레스는 인간으로서의 한계에 겁없이 도전한 영웅이었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신과 운명의 횡포에 도전하고 싶은 그리스인들의 욕망을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라의 문제를 해결한 영웅 예(羿), 장수(長壽)를 꿈꾸다

동양의 영웅신화로서 익히 알려진 것은 예(?) 신화이다. 예는 활 잘 쏘는 용사였다. 성군으로 유명한 요(堯) 임금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하늘에 해가 열 개나 동시에 떴다. 가뭄이 들어 곡식이 타 죽고 백 성들이 못 살겠다고 난리가 났는데 용사 예가 나섰다. 그는 열 개의 태양을 향하여 활을 쏘았고 그중 아홉 개를 떨어뜨렸다. 이제 태양들로 인한 소동은 진정되었다.

그러나 가뭄을 틈타 여러 괴물들이 뛰쳐나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었다. 예는 다시 모험 길에 나서 코끼리도 삼킨다는 큰 구렁이라든가, 끌 같은 이빨을 지닌 괴물, 태풍을 일으키는 큰 새, 난폭한 멧돼지 등을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열 개의 태양을 향해 활을 쏘는 예.
이미 명중되어 떨어진 태양들이 죽은 까마귀로 변해 예의 발치에 흩어져 있다.
(사진 출처 : <천문도(天問圖>)
 
 
지상의 이 모든 어려운 일들을 수습한 후 예는 불사약을 얻으러 곤륜산(崑崙山)의 여신 서왕모(西王母)를 찾아갔다.
서왕모는 예의 공적을 치하한 후 불사약을 흔쾌히 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예의 아내 항아(姮娥)에게서 일어났다. 그녀는 남편 예가 사냥 나간 사이에 불사약을 혼자 다 먹어 버렸던 것이다. 항아는 불사약을 훔쳐 먹고 하늘로 올라갔지만 벌을 받아 두꺼비로 변하여 달에 몸을 숨겼다.

 항아가 두꺼비로 변하는 모습을 표현한 한(漢)대의 화상석.

예는 절망하였지만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제자들을 모아 활쏘기를 가르쳤다. 제자 중에는 봉몽(逢蒙)이라는 제법 활을 잘 쏘는 자가 있었는데 스승 예를 죽이고 일인자가 되려는 흉악한 마음을 품었다.

어느 날 예가 사냥 갔다 돌아올 때 봉몽은 길목에 숨었다가 복숭아나무 몽둥이로 스승 예를 때려죽이고야 말았다.

예가 비참하게 죽자 백성들은 그의 공적을 기려 그를 귀신의 우두머리 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귀신의 우두머리인 예가 복숭아나무 몽둥이로 맞아 죽었기 때문에 모든 귀신들은 복숭아나무를 무서워한다. 그래서 지금도 제사상에는 복숭아를 놓지 않는다.


영웅의 행로는 우리 내면의 성장과정이다

헤라클레스 신화와 예 신화를 중심으로 영웅신화의 패턴을 생각해 보면 영웅은 모두 집을 떠나 모험을 하고 돌아오는 출발-모험-귀환의 구조를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실상 우리네 삶의 과정과 다름없다고 앞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사회 속에서의 실제적인 삶도 있지만 내면의 정신적인 삶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웅의 모험은 땅 위의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 내면의 성장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웅이 사악한 괴물을 처치하거나 요마와 투쟁하는 일은 우리가 보다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마음속의 과도한 욕망, 부적절한 생각 등을 극복하려 애쓰는 일에 비유될 수 있다. 영웅이 모험 끝에 보물을 얻거나 나라를 세우는 이야기는 우리가 미성숙한 마음을 다스려 온전한 정신적 경지에 도달한 것의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헤라클레스 신화와 예 신화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얻어진다.

첫째, 영웅은 항상 사회와 대중 속에서 성장한다. 그는 공동체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고 기꺼이 위험을 무릅쓴다. 바로 이러한 정신 때문에 영웅은 당대는 물론 후세에까지 길이 추앙된다.

둘째, 두 영웅의 말로가 비참했듯이 대부분의 영웅은 그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신적인 지위에까지 올랐다가 비극을 맞는다. 그 이유는 분수를 모르는 교만 혹은 그로 인한 방심 때문이다. 예컨대 아킬레우스는 무패의 용사였으나 생각지도 않게 아킬레우스 건에 화살을 맞아 죽게 되고, 아가멤논은 트로이를 정벌했으나 아내의 정부에게 죽임을 당한다.

셋째, 대부분의 영웅신화에서 여성은 부정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여성은 영웅을 망치거나 영웅에 의해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존재로 간주된다. 이것은 여성을 폄하하는 가부장적 의식이 영웅신화에 많이 침투되어서 그러하다. 영웅이야말로 가부장의 위대한 화신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었어도 우리는 영웅을 갈망한다. 특히 어지러운 세상, 힘든 때일수록 영웅의 출현을 바라게 되지만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거짓 영웅은 많아도 진정 공동체의 이상을 위해 헌신하는 참된 영웅은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겸허하고 차별 없는, 공평무사한 마음을 지닌 영웅임에랴.

그러나 영웅은 먼 데 가서 찾을 필요가 없다. 영웅의 길은 우리 내면의 길이기도 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신화시대의 영웅은 한 사람으로 표현되었을지 모르지만 이 시대의 영웅은 우리 모두이다. 우리 각자가 마음속 영웅의 길을 따라 내면을 도야할 때 그것은 개인을 바꿀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회를 바꾸고 세계를 바꾸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스스로 지닌 영웅 본색을 발휘할진저!


- 글

정재서 / 이화여자대학교 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