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28. 11:15

신화 다시 읽기 1

인류의 상상력 발전소, 마음을 열고 신화를 보라!

트로이의 유적을 발굴함으로써 '트로이의 목마'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의 한 장면임을 입증한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 그가 트로이를 향한 열정과 상상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어린시절 아버지에게 받은 책 한 권의 영향이 컸다. 신화 속 인물의 모험담이 가득했던 그 책은, 슐리만으로 하여금 현실 너머의 꿈을 꾸게 하고, 마침내 또 하나의 '신화'를 창조하게 했다. 신화는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 주기도 한다. 상상력이 신성장동력이 되는 시대, 상상력의 보고(寶庫)인 신화를 다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화는 그 옛날 인류의 사상과 감정을 전하는 메신저이자,
상상력의 보물창고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이다.
 

황당한 옛날이야기? 삶의 지혜를 담은 문화적 원형! 

신화는 원시 인류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삶의 지혜를 담은 신성한 이야기이다. 원시 인류는 신화를 상징이나 동화와 같은 형태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옛날이야기 같기도 하다. 특히 이성과 실천이 중시되던 시대에 신화는 쓸모없거나 심지어는 인간을 나태하게 하는 백일몽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아마 7080세대들은 그들의 청소년 시절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당시 만화방에 갈 때 얼마나 부모님의 눈치를 보아야만 했던가? 만화 보면 공부 못 한다고 꾸중을 들었지만 요즘은 만화로 공부까지 해결하려 할 정도로 인기이다. 영화 보러 가는 것은 더욱 위험스러웠다. 극장 자주 가면 깡패 된다는 경고를 들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영화는 어엿이 국민 교양으로서의 몫을 다하고 있다.
그때의 아이들은 옛날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지만 어른들은 옛날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고 만류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옛날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것이 부자 되는 지름길이다. 현대 문화산업에서 옛날이야기야말로 가장 중요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거에는 상상력과 이미지 그리고 이야기를 억압했다. 그러나 최근 우리는 이 세 가지를 가장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세 가지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간직한 것이 신화이다. 그래서 신화에 대한 관심이 부쩍 일어나고 있다.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네'를 모시는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
세계문화유산 제1호이기 이전에, 그리스 신화와 문명을 상징하는 심벌이다.
 
 

길을 잃었을 때 다시 돌아가야 할 맨 처음 자리, 신화

그렇다면 상상력과 이미지 그리고 이야기의 3요소를 지니고 있는 신화가 현대사회에 대해 작용할 수 있는 중요한 기능으로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첫째로, 신화는 인간의 정체성을 찾게 해 준다. 극도로 과학이 발달한 이즈음 우리는 바야흐로 정체성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유전공학의 발달로 복제인간의 탄생이 머지않았다고도 하고 인공지능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면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사이보그나 로봇이 활약하게 될 날이 곧 도래할 것이라고도 한다. 이들 복제인간ㆍ사이보그ㆍ로봇 등과 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신화는 원시 인류가 벌거숭이로 자연 앞에 직면했을 때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 준다. 따라서 우리는 신화를 통해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확인하고 그 고유한 가치를 깨달을 수 있다. 어딘가를 찾아가다가 길을 잃으면 우리는 반사적으로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와 다시 길을 찾아가게 되는데, 정체성 위기의 이 시점에서 신화에 대한 열띤 관심은 이와 같은 행동과 다름없다.

둘째로, 신화는 민족이나 집단의 유대와 결속을 도모하게 해 준다. 신화는 기본적으로 원시시대에 한 집단이 공유했던 생각을 담은 이야기이다. 원시 인류는 신화를 통해 사상과 감정을 공유하고 일체감을 형성했던 것이다. 신화의 이러한 기능은 오늘에도 살아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개천절이 되면 불현듯 단군신화를 떠올리며 우리 모두 단군 할아버지와 곰 할머니의 자손으로 동일한 배달겨레라는 일체감에 젖는다. 물론 한국이 점차 다문화ㆍ다민족 사회로 접어들면 더 높은 차원에서의 결속을 위해 이러한 단일민족의 신화도 변화가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셋째로, 신화는 자연에 대한 친화적 감수성을 회복시켜 준다. 신화시대에 인류는 자연의 품속에서 조화롭게 살았다. 자연은 인류 생존의 모태이자 따라야 할 법도였다. 신화 속에는 인류와 자연의 공존 관계가 잘 표현되어 있다. 가령 반인반수의 괴물은 오늘날 징그럽게 여겨지지만 원시 인류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동물과 인간이 한몸 속에 있는 것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자연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파괴하였다. 그 결과 이제는 자연의 반격으로 환경 위기에 직면하면서 인류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되자 다시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노력, 즉 생태주의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신화는 메마른 우리의 기계적 심성에 자연에 대한 따뜻한 감수성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신화 속에서 우리는 자연 앞에 직면한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또 옛 사람들의 사상과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자연과 공존했던 시대의 따뜻한 감수성을 호흡할 수 있다.

 

현대 문명은 신화 속 '창조적 상상력'이 실현된 것

 위에서 현대사회에 대한 신화의 중요한 기능 세 가지를 들었지만 사실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하여 신화가 행사해 온 가장 큰 기능은 바로 창조적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신화에 담긴 무한한 상상력은 지금까지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유래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타인의 사랑을 거절하다가 자기애에 빠진 나르시스 신화에서 비롯한 나르시시즘 등은 인류 문명의 본질을 해석하는 너무나도 유명한 가설들이다.

나르시시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카루스 패러독스 등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들 중에는 신화에서 파생된 것이 많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보자. 이카루스는 미노스 대왕의 미궁에서 탈출하기 위해 양초를 녹여 새 깃털을 이어 붙인 날개를 몸에 단다. 그는 미궁을 날아 탈출했으나 자만한 나머지 태양 가까이 올라갔다가 양초가 녹아 추락하고 만다. 여기에서 ‘이카루스 패러독스'라는 교훈이 생겨났다. 즉, 적당하면 이득
이 되지만 과도하면 해가 되는 이해의 양면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신화는 이처럼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전해 준다.

신화적 상상력은 사상ㆍ문학ㆍ예술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한 저명한 과학 잡지는 요즘 만들어진 첨단 과학 기기 대부분의 아이디어가 수십 년 전에 유행했던 공상과학소설에서 이미 첫선을 보인 것들이라는 통계자료를 내놓기도 했다. 신화적 상상력이 현대 과학기술을 통해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이 밖에도 신화적 상상력을 활용한 예는 주위에서 흔히 발견된다. 최근 중국이 달을 향해 발사한 우주선의 이름은 ‘창어'였다. ‘창어'는 우리 발음으로는 ‘항아(姮娥)'이고 중국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여신의 이름이다. 원래 항아는 활 잘 쏘는 영웅 예(羿)의 아내였는데 남편이 얻어 온 불사약을 훔쳐 먹고 달로 달아나서 그곳의 여신이 되었다고 한다.
미국의 유인 우주선 아폴로에서 이미 그러한 선례가 있었지만 그 외에도 신화에서 이름을 취한 발명품ㆍ상품 등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가령 미국의 지대공 미사일 중에 ‘허큘리스'라는 것이 있다. 허큘리스는 그리스 신화의 힘센 영웅 헤라클레스의 미국식 발음이다. 아마 이 이름처럼 그 미사일의 강력한 파워를 표현해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중국이 지난해 발사한 달 탐사선 '창어'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이다. 신화적 상상력이 현대 기술과 어우러지고 있는 현상들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신화는 많은 기업들에게 갈 길을 제시하는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신화는 우리의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는 원형과도 같은 것이어서 신화적 명명은 친근하고 쉽게 대상의 속성을 전달해 줄 뿐만 아니라 완벽하게 미화하는 효과까지 있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이름을 통해 자신을 널리 알리려는 광고야말로 거의 신화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은 인간의 욕망을 합리적ㆍ기술적으로 추구하는 대표적 조직이다. 그렇다면 기업이 추구하는 욕망이 얼마만큼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행위가 공동체의 이상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가 기업 성패의 관건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편적 욕망의 조화로운 달성을 추구하는 신화의 지혜는 기업의 바람직한 발전에 대해 많은 시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 글

정재서 / 이화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