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24. 08:58

권력이동 3

[권력이동3] 디지털 루덴스ㆍ디지털 부머, 한국 사회 변화 이끌다.

최근의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면 힘의 이동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극명하게 알 수 있다. 평범한 국민들이 밝힌 촛불은 대한민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과 쇠고기 재협상을 하게 만들었으며, 휴대폰과 와이브로 등을 통해 그들이 직접 생중계한 촛불집회 현장은 여론을 움직이는 힘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디지털 루덴스'들이 만든 대중문화와 여론을 '디지털 부머'들이 따라 하기 시작하면 '대세'가 되는 사회를 살고 있다. 이러한 힘의 이동을 파악하고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화합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이 아닐까. 


변화의 축을 몰랐던 주류의 실패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프레임'에 따라 동일한 세상을 다르게 본다. 자신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의 표시였을까? <프레임>이라는 제목의 책은 MB정부 인수위원회의 필독서였다고 한다. 정작 그들은 한국 사회에 있는 다양한 프레임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는 실패했다. 왜냐하면 주류로 대세를 설정하려고 했던 MB정부는 출범 100일도 되지 않아 곤경에 처했기 때문이다.

집권 세력으로 주류에 속한 사람들의 프레임은 무엇이었을까? 또 주류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프레임으로 한국 사회의 대세를 설정할 수 있는가?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변화의 축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현실과 사이버 공간의 주류와 비주류, 현실의 성인과 청소년 세대 그리고 현실의 삶과 '쇼(show)'의 이중적인 성격을 알아야 한다.

 


디지털 루덴스와 디지털 부머의 힘

‘티핑(tipping)'이란, 유행과 대중문화를 만들어 내는 일처럼 마치 정점에 있는 무엇을 툭 건드려 일으키는 커다란 변화, 또는 눈사태와 같은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는 조그만 자극의 효과를 확인하는 시점이다. 디지털 세상에서 티핑과 같은 유행을 일으키는 주도집단은 '디지털 루덴스'이다.

이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재미있는 일, 폭발적인 집단행동이나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유발할 수 있는 '꺼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이다. '인터넷 괴담', '악플', '디시폐인', '아프리카', '아고라' 등의 활동이 열광적으로 일어나도록 판을 그리는 사람들이다. 새로움과 재미를 주는 무엇엔가 열정적으로 끌려 열광적으로 빠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티핑은 못 만들지만 티핑이 일어나는 일을 '대세'로 지각하고 또 그것에 집단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명 '디지털 빠순이'라고도 불리는 '디지털 부머(boomer)'들이다. 디지털 부머들은 디지털 루덴스들이 만든 재미있는 행동을 따라 한다. 이뿐 아니라, 자신들의 관심에 따라 추종하는 집단을 동아리로, 때로는 스터디그룹으로 만든다. 혼자서 놀기보다는 여러 사람들과 같이 노는 것을 즐긴다. 개인주의적이고 즉흥적이지만 서로 집단을 이루기만 한다면 그들 사이에 강한 유대감이 있다.

'디지털 루덴스'들이 만든 소비행동ㆍ유행이나 대중문화가 사회적 관심이 될 때, 디지털 부머들은 점차 이것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디지털 부머들을 촉발시키는 대상은 한국 사회에서 대세로 자리잡은 그 무엇이다.

 

무엇이 대세가 되든 간에 유행이나 대중문화는 그 자체로 사람들의 마음을 잡는다. 열풍 현상이나 성공한 마케팅 사례들은 이런 대세와 유행이 어떤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는지를 잘 보여 준다. 급작스런 유행의 출현, 또는 대중문화의 확산에는 항상 디지털 루덴스와 디지털 부머와의 결합 현상이 있다.


집회 참여ㆍ집단행동으로 형성된 집단 정체성

2008년 5월에 시작한 촛불시위는 디지털 루덴스와 디지털 부머의 완벽한 합작품이었다. 처음 촛불집회를 일으킨 주인공은, 아무런 이유 없이 또는 막연히 연예인의 공연을 기대하면서 청계광장에 나왔다가 루덴스의 놀음판에 참여한 이른바 '디지털 부머'들이었다.

이때 참석자의 60~70% 정도가 중ㆍ고 여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은 '빠순이'라고 지칭되는 디지털 부머들이 누구인지, 어떤 속성을 가졌는지를 있는 그대로 알려 준다. 그들의 대다수는 집회에 참여하거나 집단행동을 하면서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을 형성한다. ‘미국 쇠고기 수입'이나 '광우병'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이런 집단 정체성을 쉽게 공유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촛불시위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불편함과 불만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밉다고 누구나 촛불시위로 거리에 나서지는 않는다. 2008년 5월 2일과 3일의 촛불시위는 ‘마음에 들지 않는 대통령'에 의해 티핑되어 일어난 디지털 루덴스들이 만든 사이버 공간 속의 놀이였다.

 

이것은 '광우병 괴담'으로 확산되기도 하고, 또 '미친(美親) 쇠고기'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 놀이는 현실세계에서 연예인들을 추종하는 디지털 부머들이 사이버 공간을 통해, 그리고 현실로 침투한 사이버 집단을 통해 진행된 촛불시위 놀이였다.

여기에 또 다른 프레임을 가진 집단이 있다. 그들은 바로 디지털 세상을 일하거나 공부하는 공간으로만 보는 '정보근로자'이다. 이와 유사하지만, 현실 속의 주류 질서와 규범ㆍ논리와 합리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이들을 '회사인간'이라고 부른다.

정보근로자와 회사인간들은 디지털 루덴스와 디지털 부머들의 놀이를 처음에는 일시적인 쇼로 무시한다. 하지만 점차 학생들 사이에 한국의 온라인게임이나 뮤지컬 같은 쇼가 점차 대세를 형성한다면, 우리는 이것을 쇼가 아닌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불확실성의 시대, 대세를 추종하는 사람들

한국인이 대세추종 현상을 보이는 것은, 우리 사회가 점차 복잡하고 불안한 양상을 띤다는 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너무나 명확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때로 더 이상 확실하지도 않다. 아니, 분명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주류의 질서가 무너지고 비주류가 주류의 위치를 점하는 순간에 이런 불확실성과 혼란은 증가한다. 보통 새로운 대세(大勢)가 형성되면, 점차 많은 사람들이 이 대세를 추종한다.

대세추종 현상은 동조(同調)나 무조건적인 집단추종과는 다르다.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변화가 무엇인지를 알고, 또 자신이 판단한 대세에 따라 자신의 적응력을 높이려는 노력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세형성과 대세추종 현상은 우리 사회를 더욱 역동적이게 만든다. 이 와중에서 마치 쇼(show)와 같은 사이버 공간의 일들이 현실에서 부각된다. 아니, 현실이 마치 한편의 쇼(show)처럼, 현실과 다른 공간인 사이버 공간과 연계되어 나타난다.

주류 집단은 이런 변화를 당혹스럽게 또는 혼란을 겪으면서 경험하며, 비주류 집단은 이런 혼란 속에서 자신들이 만든 ‘대세'에 따라 다양한 프레임을 가진 집단들이 대세추종 행동을 보이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대부분의 주요 사회적 이슈와 사회 현상은 주류에 의해 주도된다.

이에 비해, 비주류는 단순한 즐거움, 재미, 호기심 같은 감성적인 요소에 바탕을 둔 우연한 행동들을 즐겨 하는 사람들이다. 원래 쇼는 비주류의 전유물이지만, 점차 현실(reality)이 쇼로 바뀌어 간다. 한국 사회의 대세추종 현상은 마치 쇼에 참여하는 놀이의 행위이다. 촛불집회 같은 사회적 행사에 청소년들이 참여한 것도 쇼에 동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철저하게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그 무엇이 어쩌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대세'를 인정하는 자세

촛불시위를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라는 고정된 프레임으로 익숙하게 보는 사람은 이것을 분명 '디지털 민주주의', '길거리 민주주의', '집단지성', '디지털 포퓰리즘' 등의 용어들로 표현한다. 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프레임이다. 이런 프레임을 가진 사람들에게 미국 쇠고기는 '질 좋고 싼 쇠고기'일 뿐이다. 많이 수입하여 국민들이 얼마나 이것을 즐기고 좋아하는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으로 대세를 잡으려 한다.

결론적으로, 초기의 촛불집회는 디지털 루덴스가 만든 판에 디지털 부머가 열심히 집단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이 경우 비주류가 대세를 점거했다. 대세에 동참하는 강력한 힘은 우연히 발생한 촛불집회를 거의 두 달 이상 계속되는 분명한 사회현상이 되게 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주류'라는 오류에 빠져 비주류가 어느새 대세가 되고 있는 현상을 간과한다면, 우리 사회의 대립각은 더욱 날카로워질 수 있다. 힘의 이동은 이미 곳곳에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 황상민 /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