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7. 24. 09:00

권력이동 2

[권력이동2] 여풍당당 우먼 파워, 더 이상 신기한 일 아니다.

'남녀평등'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어색한 시대가 되긴 했다. 여성들은 이제 남녀평등을 넘어 남성 못지않은 지위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보스포럼은 ‘여성'에 의한 사회와 소비 패턴의 변화에도 주목하고 있다. 오늘날 여성들은 사회활동을 통해 경제적인 자립 능력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활발한 정계 진출을 통해 권력 면에서 막강한 힘을 축적하고 있다.

힘이 이동하는 또 하나의 길, 바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있다. 


침묵하는 남성, 목소리 내는 여성

‘배운녀자 신드롬'이라는 말을 아는가? 촛불집회로 생긴 신조어다. ‘배운녀자'란 많이 배운 고학력의 여성을 뜻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행동하는 여성'을 뜻한다.
이들은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위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석하고 광고불매운동을 일으키고 정치ㆍ경제ㆍ사회에 변화를 일으키는 여론의 주도세력이 되고 있다. 집에 돌아가서는 남편과 아이들을 가르치고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과 참여가 늘면서 남성에서 여성으로의 힘의 이동이 본격화하고 있다. 경제활동에서 의사결정의 주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고 있고, 집안에서 구매를 좌우하는 핵심적인 의사결정권도 여성이 쥐고 있다.

가정 교육에서도, 주요 여론을 형성하는 데서도, 여성은 이제 사회의 중심무대에 있다. 남성은 침묵하고, 여성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지구촌을 보아도 그렇다. 보수적이던 이슬람 여성까지 머리에 착용하는 두건, 즉 히잡을 벗어던지고 있다. 남성이 독점적으로 누려 왔던 국가 수반의 자리도 여성에게 넘어가고 있다.


6개 대륙의 ‘마담 프레지던트' 시대

‘마담 스피커(Madam Speaker)', 여성 하원의장을 뜻하는 이 단어는 지난 2007년 1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용된 말이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여성인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의원이 하원의장이 됐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미국 하원의장은 남자의 몫이었기 때문에 호칭은 ‘미스터 스피커(Mr. Speaker)'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북미와 남미, 유럽, 오세아니아 등 6개 대륙을 보자. 모두 여성 정상시대, 즉 ‘마담 프레지던트' 시대가 열렸다.

2005년 11월 부산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담에 참가한 각국 정상들.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뉴질랜드 헬렌 클라크 총리,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필리핀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이다. (사진 : 뉴스뱅크이미지)
   

앙겔라 메르켈은 2005년 독일 첫 여성 총리가 됐고, 타르야 할로넨은 이보다 5년 앞서 2000년 핀란드 첫 여성 대통령이 됐다. 2006년에도 재집권에 성공했다.

헬렌 클라크는 1999년부터 뉴질랜드 총리로 집권하고 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는 지난해 남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 아르헨티나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세계 첫 부부 대통령이 됐고, 엘렌 존슨-설리프 라이베리아 대통령은 2006년 아프리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됐다.

같은 해 미첼 바첼레트는 칠레 첫 여성 대통령이 됐다. 이 밖에도 아일랜드의 메리 매컬리스, 필리핀의 글로리아 아로요, 인도의 프라티바 파틸 등 많은 여성이 국가를 이끌고 있다.


글로벌 기업 이끄는 '여성 CEO' 시대

정치계는 물론 재계에도 우먼 파워는 거세지고 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천이 발표한 ‘포천 500대 기업'을 이끄는 여성 CEO는 모두 12명에 달한다. 2000년까지의 4명에서 3배가 늘었다.

인드라 누이 펩시 CEO는 2006년 포천 선정 미국 재계의 파워여성 1위가 됐고, 멕 휘트먼 전 이베이 회장은 누이 회장에 앞서 2004~2005년 연속 파워여성 1위의 자리를 지켰다(멕 휘트먼은 지난 10년 동안 미국의 전자상거래 업체 이베이의 성장을 주도한 인물로, 최근 취임 10주년을 끝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또 곡물사료업체 아처 다니엘 미드랜드의 패트리샤 웰츠 CEO는 남자 직원이 대부분인 회사를 지휘하고 있다. 이 밖에 제록스, 웨스턴 유니언, 라이트 에이드, 레이놀즈 아메리칸, 크래프트 푸즈 등의 글로벌 기업을 여성들이 이끌고 있다.

이베이의 성공신화를 이끈 멕 휘트먼 전 이베이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 올 3월 이베이 CEO에서 사임한 후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 : 뉴스뱅크이미지)


가계 지출ㆍ구매 90% 장악한 우먼 파워

여성으로의 힘의 이동이 중요시되는 것은 여성들이 주요 의사결정의 중심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는 물론 시장에서, 기업에서, 여론조사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먼 파워가 커지면서 남성에서 여성으로 경제권도 이동하고 있다. 미국 전체 가구 수입의 절반은 여성 이 벌어들이고, 가계 지출과 구매의 80~90%가 여성의 손을 통해 이뤄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로 여성이 승용차의 68%, PC의 56%, 가전제품의 51%를 구매한다.

샌프란시스코의 경우 유권자 중 53%가 여성이다. 특히 20~30대 전문직 싱글족 여성을 중심으로 한 우먼 파워가 이곳의 소비 패턴을 바꿔 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미국 최대 가전유통업체 `베스트 바이(BEST BUY)'는 싱글족과 여성 고객들을 사로잡는 이색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여성과 주부가 소비 패턴을 결정하는 핵심으로 등장하는 현상을 마케팅 전략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가정에서, 기업에서 그리고 시장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여성들이 가계 수입의 일정 부분을 담당하게 되면서 구매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나아가 여성 특유의 감성을 자극해 소비로 연결시키는 ‘감성 마케팅'이 새로운 여성 고객을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여성의 입소문을 활용한 마케팅 방안도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뉴스가 안 되는 ‘금녀(禁女)의 벽'

한국 사회에도 금녀의 벽이 사라지고 있다. 육해공군이 여성 생도를 배출한 지 오래됐고, 그들은 이제 전투기와 함정 조종은 물론 전투에까지 참여하고 있다. 또 사법고시ㆍ외무고시ㆍ행정고시 같은 국가고시는 물론 기업ㆍ금융ㆍ학계에 이르기까지 ‘여풍(女風)'은 사회 전반에 거세게 불고 있다.

금녀의 벽이 무너지면서 ‘1호 기록'을 가진 여성들의 도약도 눈부시다. 한명숙 전 열린우리당 의원은 광복 이후 처음으로 한국의 여성 총리가 됐다. 이에 앞서 2003년 전효숙 씨는 첫 여성 헌법재판관이 됐고 김영란 판사는 2004년 여성으로서 첫 대법관의 자리에 올랐다. 2002년에는 군에서도 첫 여성 장군(양승숙)이 배출됐다.

이처럼 여성의 활발한 사회 진출은 패러다임을 바꿔 놓고 있다. 경제적 관점에서 소비시장의 변화는 물론 사회ㆍ문화적 변화까지 일어나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에 여성 비율이 너무 높아 '아이들이 여성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고 있는데, 이것도 그러한 변화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할 수 있다. 우먼 파워는 갈수록 거세질 것이며, 그로 인한 문화적 충격들은 우리 사회에 더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필요한 건, 남성과 여성의 '협력 모델'

문제는 남성과 여성이 어떻게 ‘협력 모델'을 만들어 남성의 힘만으로 하기 힘든 ‘새로운 혁신'을 만들어 내느냐에 있다. '섬세함' 같은, 남성이 갖지 못한 여성의 장점과, 남성의 장점들이 효율적으로 결합된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  

 

기업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이제 각 기업들은 여성의 능력과 리더십을 개발하고, 또 양성(兩性)이 서로 배려하고 협력할 수 있는 문화와 시스템으로 21세기형 ‘신(新)문화'를 만들어 내야 할 것이다.


- 최은수 / 매일경제신문 세계지식포럼 팀장
                   저서 <다보스포럼 리포트: 힘의 이동> , <부의 창조> ,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나요>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