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07.31 ‘인문학이 삶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의 한 증거, 비블리오테라피(독서치료)
  2. 2008.07.31 서울대, 인문학으로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게 된 이유는?
  3. 2008.07.31 인문학, 노숙인의 인생까지 바꾸다.
2008. 7. 31. 12:39

‘인문학이 삶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의 한 증거, 비블리오테라피(독서치료)

‘인문학이 삶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의 한 증거, 비블리오테라피(독서치료)

인문학은 치유의 학문이고 행복의 학문이라는데, 그 말의 의미를 완전하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의학이라면 모를까 인문학이 어떻게 사람을 치유한다는 걸까. 하지만 '독서치료'라는 말을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가.

우리말로 흔히 '독서치료'라고 번역되는 비블리오테라피(bibliotherapy)는 인문학 치료의 본령을 이루는 것으로, 문학작품을 읽고 얘기함으로써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을 가리킨다. 직장인들이 겪는 다양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 비블리오테라피를 소개한다.


물질생활과 정신세계의 조화를 돕는 인문학

생물체는 외부와 내부의 환경 변화 속에서 생리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생물학 용어로는 항상성(homeostasis)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체온이 정상적인 한계를 초월하여 상승할 경우 땀이 발생하여 체온이 조절되는 신체적 기능이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인간에게 항상성은 생리적 메커니즘에만 작동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정신 또한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거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율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인간의 정신적 메커니즘에서 작동하는 항상성, 즉 '정신적 항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문학은 이런 과정을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다.

문학ㆍ역사ㆍ철학 등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은 인간의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탐구한다. 인문학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물질생활과 정신세계의 조화 속에서 찾는다. 만약 누군가가 물질적 충족만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의 정신세계에 어떤 결핍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물질과 정신의 부조화 상태는 심리적 불안이나 정신적 위기를 부른다. 생존경쟁이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직장인들이 자신의 삶이나 미래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과 허무함을 느끼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런 경우 정신적 항상성의 기능을 촉발시키기 위해 인문학적 담론이나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신체적 항상성뿐만 아니라 정신적 항상성이 유지될 때 몸과 마음의 평안을 이룰 수 있다.
정신적 항상성을 추구하는 학문, 바로 인문학이다.


직장인들이 자신의 삶과 미래에 막연한 불안을 느낄 때

복잡한 현대사회를 사는 직장인들은 대개 다음과 같은 유형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자기 자신에 대해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런 유형의 문제들은 자기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거나 자신을 통제하는 억제력이 부족한 경우, 지나치게 소극적인 성격, 자기평가에 너무 민감한 성격, 타인에게 종속될 정도의 의존적 성격 등으로 나타난다.
둘째, 타인에 대해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이다. 사랑과 증오, 우정, 존경과 공경, 권위와 동의 등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거나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경우가 이런 유형과 관계가 있다.
셋째, 사회에 대해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이다. 이런 유형은 대개 사회적응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경우와 연관이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사회생활에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상실감, 소외감 등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넷째, 삶 자체에 대해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이다. 이런 유형으로는 삶의 의미와 가치, 죽음, 영혼, 자유, 진리, 정의 등에 대해 상식을 넘어선 극단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 자신은 어떤 유형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진단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독서를 통해 마음을 치유하는 비블리오테라피

직장인들이 겪는 이런 문제들은 문학을 통한 마음치유법인 '비블리오테라피'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문학작품 독서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전문용어로 비블리오테라피(bibliotherapy)라고 한다. 비블리오테라피라는 말의 어원은 biblio(책, 문학)와 therapeia(도움이 되다, 의학적으로 돕다, 병을 고쳐주다)라는 그리스어의 두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therapeia'가 약물이나 수술 같은 물리적 치료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ㆍ육체적 질병을 치유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물리적 방법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심리적 방법이다. 즉, 'therapeia'는 인간의 심리세계에 어떤 작용을 가하여 육체와 정신의 불안정한 상태를 호전시키는 방법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비블리오테라피는 ‘독서치료'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비블리오테라피에서 사용하는 자료들은 대개가 동화, 동시, 이야기(설화ㆍ전설), 소설, 희곡, 시와 같은 문학작품이다. 그래서 좁은 의미에서 비블리오테라피를 ‘문학치료'라고도 한다.
비블리오테라피는 문학작품의 치유적 기능을 현실 속에 접목시킨 하나의 예이다. 우리는 비블리오테라피를 통해서 인문학이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일정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비블리오테라피는 문학작품을 통한 마음치유법이다.
동화, 동시, 이야기(설화ㆍ전설), 소설, 희곡, 시와 같은 문학작품을 읽으며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기 때문에 좁은 의미로는 '문학치료'라고도 한다.


비블리오테라피의 분류, 임상적인 것과 자기 계발적인 것

비블리오테라피는 크게 임상적인 것과 자기 계발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임상적 비블리오테라피(clinical bibliotherapy)는 특수한 치료 프로그램에 포함된 보조수단으로서 환자가 건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예를 들어 임상적 비블리오테라피에 참여할 수 있는 경우로는 정서적ㆍ심리적 장애요인으로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이나 사회교정시설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포함될 수 있다.
이에 비해 자기 계발적 비블리오테라피(developmental bibliotherapy)는 모든 개인의 정상적인 성장과 유익한 발전에 기여하는 일상적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계발적 비블리오테라피는 현대인들이 개인적 감정을 조절하고 자기인식을 향상시키며 자존심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경우로는 학교, 교회, 지역사회, 도서관 등에서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원하는 일반인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참여자들은 성장기 청소년들의 자아정체성, 성인들의 늙음(나이듦)과 병듦에 대한 이해, 죽음에 대한 이해 등과 같은 주제를 공유할 수 있다.


비블리오테라피의 핵심, 자신과 타인에게 말 걸기

비블리오테라피의 과정은 일반적으로 참여자가 어떤 인식적ㆍ행동적 변화를 경험하는지를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문학작품을 읽는 사람은 ‘동일시', ‘자기 들여다보기', ‘비교하기', ‘타인에게 말 걸기' 등과 같은 심리적 체험을 경험한다.

 

 비블리오테라피는 문학작품을 읽고 얻게 된 생각과 감정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또 타인에게 말을 거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비블리오테라피는 정신의 오솔길로 들어가는 체험이 될 수 있다.

비블리오테라피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심리적 체험 중 하나는 ‘동일시'(identification)다. 이것은 참여자가 자기와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는 주인공을 만나게 되면서 자기와 다른 사람(작품의 주인공)을 유사하게 지각하는 과정을 말한다. 동일시는 특히 난처한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타인의 정체성을 차용하여 자신의 방어기제로 사용된다. 그 예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좌절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평범한 영웅들을 모방한다. 이러한 동일시는 환상을 통해 구축되는 어떤 신화적 실체나 미디어 이미지를 통해서 실현되기도 한다.
‘자기 들여다보기'는 참여자가 자신의 문제를 느끼고 상상하고 사고하는 어떤 것을 말한다. 참여자는 독특한 코드를 가지고 작품을 읽는다. 그는 작품 속에서 자기만이 느낄 수 있는 특수한 상황을 체험하며, 이런 과정을 통해 자기 들여다보기를 경험한다. 참여자가 자기 들여다보기를 경험하는 방법이나 과정은 매우 다양하며 직접적이다.
‘비교하기'란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얻게 된 생각이나 감정을 나란히 놓아 보는 행위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비교하기'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두 개 이상의 생각이나 감정을 병렬 또는 병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현재라는 시공간적 구조는 ‘비교하기'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이다. ‘비교하기'의 또 다른 유형은 ‘나'와 ‘타자'를 병치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참여자는 ‘비교하기'를 통해서 인간에게는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며, 그것이 모두 존중되어야할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타인에게 말 걸기'는 문학작품을 읽고 얻게 된 생각과 감정들을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와 관점으로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심리적 장애요인을 가지고 있었던 참여자가 그것을 극복하고 타인에게 관여하는 방법이나 사회적 현상에 대해 적극적인 심리적ㆍ정서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에게 말 걸기'는 달리 말하면 ‘자기 밖으로 나가기'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과 타자의 관계의 산물이다. 자기 밖에 있는 타자나 그 타자의 집합체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인간은 자립적인 삶을 유지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타인에게 말 걸기'는 자기 밖의 세계로 나가 다양한 타자와 일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보다 성숙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내 삶을 변화시키는 학문, 그러므로 인문학은 실질적이다!

비블리오테라피는 참여자 중심의 텍스트 읽기다. 참여자는 일반적인 독자와는 달리 특별한 목적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 텍스트 읽기에서 참여자의 이런 특수한 위치는 많은 장점으로 작용한다. 작품을 보다 집중적으로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처지나 경험에 비추어서 감정이입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
비블리오테라피가 참여자의 예술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와는 낯선 세계 혹은 타자를 경험하는 것은 현재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심리적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 안에 갇혀 밖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냐는 선입견이 강하기 때문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안고 있는 문제는 역설적으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인에어>에 나오는 한 장면을 떠올리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희생의 광경을 보자, 지금까지 자신만을 생각하던 마음이 밖으로 돌려졌다.”

 

 자기와는 낯선 세계 혹은 타자를 경험하는 것은
현재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문학작품은 그러한 다양한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사진은 문예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비블리오테라피 수업 장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문학을 관념적이고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이것은 학문의 속성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인문학이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수신자의 입장에서 접근한다면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을 것이다. 비블리오테라피가 우리 삶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인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예아카데미( www.myacademy.org )에서 필자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비블리오테라피 과정을 소개한다. 이제까지 개설된 주제와 도서목록은 다음과 같다.

* 주제 1. 관계의 불편함에 대하여

   1. 타인과의 거리 / 김애란, <나는 편의점에 간다>
   2. 관계의 불안 / 체호프, <관리의 죽음>
   3. 벽과 벽 사이 / 카프카, <변신>
   4. 삶에 대한 무관심 / 알리세르 파우즈,
   5. 관계와 소통 / 마종기, <전화> 외

* 주제 2. 사랑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

   1. 바라보기 혹은 질투? / 뚜르게네프, <첫사랑>
   2. 지켜야 할 것과 은폐해야 할 것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덤불 속>
   3. 섹스의 진실 / 은희경, <먼지 속의 나비>
   4. 사랑과 성적 정체성 / 마이에렐, <커밍아웃>
   5. 사랑에 대하여 / 정희성, <너를 부르마> 외

* 주제 3. 삶과 죽음의 경계 허물기

   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솔제니친, <암병동>
   2. 중독된 삶 / 알리세르 파우즈, <약>
   3. 죽음을 비교하기 / 톨스토이, <세 죽음>
   4. 인디언이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 헤밍웨이, < 인디언 부락 >
   5. 삶과 죽음의 경계 허물기 / 신경림, <강 저편> 외 


- 글

이병훈 / 문예아카데미 기획실장

2008. 7. 31. 12:37

서울대, 인문학으로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게 된 이유는?

서울대, 인문학으로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게 된 이유는?

우리가 공부를 하고 직장을 다니고 저축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을 읽고 우정을 쌓고 사랑을 하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 궁극적으로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행복하냐는 질문에 주저없이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인문학이야말로 '행복론'이라고 설파하는, 그래서 2008년 1학기부터 학생들에게 '행복학'을 가르치고 있는 서울대 김창민 교수의 얘기에 잠깐 귀를 기울여 보자. 


쉴 틈 없이 경쟁에 내몰리는 학생들이 안쓰러웠습니다

요즘 직장인은 대부분 일에 쫓기며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아침에 출근하면 퇴근할 때까지 잠시도 여유가 없지요. 학교도 마찬가집니다. 남들은 교수가 편하다지만 저도 매일 쫓기듯 살아갑니다. 대학생도 마찬가집니다.

저는 핵심교양 수업을 하나 맡고 있습니다. 매 학기 첫 수업시간마다 학생들에게 꽉 짜인 수업 일정을 알려 줍니다. 많은 과제를 부과하고, 쪽지시험ㆍ기말고사ㆍ평가방법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그때마다 열심히 듣고 있는 수강생들의 얼굴을 바라보면 대견스럽기보다는 오히려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게다가 신입생들이면 제 마음은 더욱 편하지 못합니다.

서울대에 오기 위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충분히 잠도 못 자고, 친구들과 맘껏 놀지도 못한 학생들인데….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글로벌 경쟁력'을 운운하면서 또 쉴 틈 없이 경쟁으로 내몰립니다. 가슴 한 구석이 아려 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위해 내가 가르쳐야 할 것은 무엇일까? 비인본적인 신자유주의에 대항에 싸우는 혁명가가 되라고 할까? 하지만 우리나라가 글로벌 경제체제에서 벗어나 우리 나름대로 인본주의적 경제제도를 만들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경제규모도 안 되고…. 무력감과 자괴감만 더 느꼈습니다.

 

 대학에 가기 위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공부에 시달리는 학생들.
하지만 대학에 가도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무한경쟁이다.


행복도 자전거 타기처럼 배울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 2006년 어느 날 저의 관심을 끈 기사가 있었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 심리학 강사 벤-샤하르의 '행복학' 강의가 최고 인기 강좌로 떠올랐다는 겁니다. 수업시간에는 '8시간 이상 수면하기'를 과제로 내주기도 하고, 수업 도중에 조명을 낮추고 명상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그 강의는 과제와 시험으로 정신적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하버드 공부벌레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는 기사였습니다.

그 후 어느 날, 미국 클레어몬트대학에 ‘행복학' 대학원 과정이 설치된다는 기사를 또 보았습니다. 확인해 보니 공식적인 이름은 ‘응용긍정심리학(Applied Positive Psychology) 석사 과정'이었습니다. ‘긍정심리학'을 중심으로 행복지수를 높여 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행복전문가' 과정이었습니다.

미국의 ‘행복학'은 최근 심리학의 한 흐름인 긍정심리학(Positive Psychology)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긍정심리학'이라는 용어는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이 1998년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불안ㆍ우울ㆍ스트레스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보다 개인의 강점과 미덕 등 긍정적인 감정에 초점을 맞추는 심리학의 새로운 갈래지요.

‘긍정심리학'에서는 행복은 바이올린 연주나 자전거 타기처럼 배울 수 있는 '기술'이라고 주장합니다. 행복은 막연한 주관적 느낌이나 개념이 아니라 실질적이며 측정 가능한 것이기에, 행복은 연습에 따라서 얼마든지 배우고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는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에 개설된 '행복학' 강좌는,
많은 과제와 시험으로 정신적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학생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앞에 소개한 두 기사는 저에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평소 학생들을 무한경쟁으로 내몰면서 자괴감과 무력감의 터널을 지나오던 저에겐 한 줄기 희망의 빛이었습니다. 그 무렵 우리 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두 가지 전공을 의무화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습니다.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서 학제간(學際間) 연계전공의 개발을 권장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인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행복학' 연계전공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기엔 준비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행복학개론 차원에서 '동서양 고전과 행복론'이라는 한 강좌를 개설해 보는 것으로 생각을 바꾸었지요.


가르치고 토론할수록 인문학이 '행복학'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곳이 인문대학이니 인문학의 여러 분야에서 행복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우선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동서양의 문학과 종교ㆍ철학에서는 무엇이 행복이고,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다고 하는지 확인하고 정리해 보자는 거죠.

예를 들어 불교ㆍ기독교ㆍ유교에서 이야기하는 행복론이 서로 어떻게 연관이 되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학생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각 언어권별 문학작품과 문호들은 무엇이 행복이라고 했는지도 알아보는 거죠. 나아가서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이 사람을 어떻게 행복하게 만드는지 직접 체험해 보는 기회도 갖고, 심리학과 뇌과학에서 발견한 ‘행복론'을 학생들에게 소개도 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업시간마다 해당 분야의 전공교수를 초빙해서 짧은 강의를 듣고 난 뒤, 강의를 공동 진행하는 교수와 강사, 수강생 사이의 토론으로 이어집니다. 새로운 주제ㆍ새로운 형식의 수업이기에 참여자 모두 즐겁습니다. 한두 시간씩 강의를 부탁받은 교수님들도 기꺼이 응해 주시고요. 행복이라는 화두로 해당 전공 분야의 지식들을 되돌아보고 꿰어 보는 작업이라서, 생소해 하면서도 재미있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수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인문학은 곧 행복학이다!'라는 생각이 점점 더 뚜렷해졌습니다. 인문학 자체가 인간의 행복을 모색하는 학문이라는 것이죠.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이든, 보편적 선(善)의 추구이든, 그것은 결국 넓은 의미에서 개인적ㆍ집단적 행복의 추구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불경과 성경은 행복론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고, 공자의 <논어>도 첫머리에 바로 ‘행복[樂]'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논어>는 첫 장(學而第一)에서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라는 것으로, 먼저 정신적 풍요와 마음의 수양이 가져다 주는 행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인간관계, 부와 명예에 대해서 초연한 자세를 통해서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모색하는 학문이다.
정신적 풍요를 강조했던 동서양 고전을 통해
물질문명이 초래한 정신적 황폐화를 개선하기 위한 것,
그것이 서울대에 '동서양 고전과 행복론'이라는 강의를 개설한 이유다.

현대의 행복론으로도 손색이 없는 가르침입니다. 맹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도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하고, 최선의 길인지 말해 주는 역설적 행복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서양 고전의 한결같은 가르침은 정신적 풍요를 통한 행복론입니다

행복론 강의는 물질문명이 초래하는 정신적 황폐화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동서양 고전과 현인들은 물질적 욕망을 버리고 정신적 풍요를 누리라고 가르칩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성경에서는 천국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 것이라 했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혁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했습니다. 불교에서도 마음을 비우고 남에게 베풀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죠.

황금만능주의 사회풍조 속에서는 상대적 박탈감ㆍ빈곤감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미국에서는 1945에서 2000년 사이에 실질 국민소득이 3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지수는 하락했습니다. 그 시기 동안 이혼율은 2배, 10대 자살률 3배, 폭력범죄 4배, 죄수 5배, 미혼모 신생아 비율 6배, 우울증은 10배가 늘었습니다. 독일과 일본 같은 선진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국도 이와 유사한 추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수십 년간 괄목할 경제적 성장은 이룩했어도 저출산ㆍ자살률ㆍ이혼율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와 있습니다. 물질적 풍요를 보완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다양한 가치(사랑ㆍ명예ㆍ희생정신ㆍ신의)들이 대부분 상실된 사회지요. 다양한 가치와 개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을지 몰라도,
끊임없는 경쟁에 내몰리면서 우리의 정신은 점점 더 빈곤해지고 있다.
정신적으로 풍요로울 때 개인과 사회 모두 지속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이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길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는 경쟁력과 성장입니다. 대중매체, 특히 TV는 지나친 물욕과 가치의 획일화를 조장합니다. 선진국의 예에서 보지만, 경제 성장이나 물질적 풍요만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인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최소한의 생계와 건강은 행복의 필수 조건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물질적 풍요와 행복은 별개의 것입니다. 정신적ㆍ문화적으로 빈곤한 사회는 행복은커녕 지속적인 발전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국가는 국민들이 물질적 풍요 못지않게 정신적 풍요를 누릴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행복지수를 높이는 것이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업도 마찬가지라고 믿습니다.


- 글

김창민 / 서울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교수

2008. 7. 31. 12:36

인문학, 노숙인의 인생까지 바꾸다.

인문학, 노숙인의 인생까지 바꾸다.

지난 2월 노숙인 인문학 과정 3기 수료식이 있었습니다. 노숙인 인문학 과정은 노숙인의 황폐한 정신을 치유함으로써 그들이 다시 사회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취지로 개설된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참 궁금합니다. 노숙인에게 필요한 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빵이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 인문학이 노숙인에게 무엇을 주는 것일까요? 게다가 재소자들을 위한 인문학 과정도 있다고 하는데 말이죠. 인문학이 가진 힘은 대체 무엇일까요? 


"인문학? 그거 배우면 밥이 나와, 떡이 나와!"
 

밤 10시, 서울역 지하보도. 눈앞에 벌어진 광경은 익숙한 서울역의 모습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습니다. 갈아 끼운 지 100년도 더 된 듯한 어두운 황색 불빛 아래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기다랗게 줄을 지어 서있었습니다. 한 자선단체에서 주는 무료급식을 기다리는 노숙인들이었습니다.

취재차 간 그곳에서 저는 ‘노숙인다시서기센터'가 운영하는 인문학 과정인 성프란시스대학 수강생을 모집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함께한 간사가 이곳저곳을 누비는 동안 저는 몇 분 가량 꼼짝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난생 처음 보는 장면에 당황한 탓도 있지만 노숙인들의 황량한 얼굴과 무람없는 몸짓에서 뿜어 나오는 무기력한 분위기에 좀처럼 적응할 수가 없다는 이유가 더 컸습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전단지를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노숙인들의 반응은 꽤 다양했습니다. 관심 없다며 손을 휘휘 내젓는 사람도 있었고, “인문학? 그거 배우면 밥이 나와, 떡이 나와!”라며 버럭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노숙인 100여 명 중 전단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10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신기했던 건 그 10여 명의 눈에선 뭔가 다른 게 느껴졌다는 겁니다.

뭔가 다른 그것이 무엇인지, 저는 며칠 뒤 성프란시스대학 면접 전형에 참관하며 알게 됐습니다. 그분들의 눈에 맺혀 있던 건 희망이었습니다. 왜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그분들은 “아무런 목표도 없이 살아왔지만, 인문학 공부는 남은 인생을 걸고 도전해 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해 지원하게 됐다”고 대답했습니다. 13년 전 미국의 빈민교육활동가 얼 쇼리스(Earl Shorris)가 노숙인ㆍ재소자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를 시작했던 건 바로 이런 대답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1995년 미국의 빈민교육활동가 얼 쇼리스는 노숙인ㆍ재소자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를 시작했다. 그들에게 '희망'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클레멘트 코스,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사다리가 되다

클레멘트 코스는 1995년 뉴욕 맨해튼에서 처음 시작됐습니다. 강의가 열린 건물명을 따 이름을 지었답니다. 죄수와 마약중독자ㆍ에이즈감염자 등 마이너리티를 대상으로 철학ㆍ역사학 등을 가르쳤는데, 첫 강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참여자 31명 가운데 17명이 강의를 수료했고, 1명을 제외한 전원이 대학에 들어가거나 전일제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일자리를 못 얻은 1명은 원래 맥도날드에 취직했지만, 노조를 만들겠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해고당했다고 합니다.

13년이 지난 지금 캐나다ㆍ멕시코ㆍ오스트레일리아 등 4개 대륙 6개 나라에서 57개의 클레멘트 코스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는 아이가 딸린 홈리스 여성에게, 가나에서는 1년의 절반을 떠돌며 유목생활을 하는 하우사족에게 인문학 강의를 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인문학뿐 아니라 예술 분야에서도 마이너리티를 대상으로 강좌를 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1975년 베네수엘라에서 시작된 ‘엘 시스테마' 운동입니다. 이것은 경제학자 호세 아토니오 아브레우가 경제사정이 넉넉하지 않던 당시 베네수엘라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폭력과 마약에 빠져드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시작한 일종의 방과후 음악활동입니다.

엘 시스테마 운동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이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거나 범죄에 연루되는 비율이 크게 줄어 사회적 비용을 크게 줄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덕분에 2개뿐이던 오케스트라는 135개로 크게 늘었고 엘 시스테마에서 배출된 연주자들로만 꾸려진 ‘시몬 볼리바 유스 오케스트라'가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노숙인 대상 인문학 과정인 성프란시스대학의 3기 졸업식.
가족과 연락도 끊고 살았던 노숙인들은 인문학을 배우면서
가족을 다시 만나고 잃었던 삶의 의욕도 되찾았다.

우리나라에서는 3~4년 전부터 마이너리티를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좌들이 속속 생기고 있습니다. 시작은 2005년 다시서기센터의 성프란시스대학입니다. 1기 21명 중 14명, 2기 20명 중 13명이 강좌를 끝까지 마쳤습니다. 대부분 가족과 연락을 재개하고 일자리를 알아보는 등 긍정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고 합니다.

또 여성성공센터 W-ing(www.w-ing.or.kr)은 성매매 피해여성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1기 수료 인원은 15명으로, 모두 취업을 하거나 창업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인권실천시민연대(www.hrights.or.kr)는 지난해부터 교도소에 구금 중인 재소자를 대상으로 ‘평화인문학'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배우다

일견 노숙인이나 재소자의 사회적 재활과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인문학이 왜 그들의 인생을 극적으로 바꿔 놓는 것일까요? 요즘의 인문학은 자연과학이나 경영학 등에 밀려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해 오지 않았던가요? 그래서 학계를 중심으로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갑론을박이 오고 간 게 벌써 오래전 일 아니었던가요?

이런 질문에 대해 제가 내놓는 대답은 위에서 언급했던 ‘희망'입니다. 인문학은 사회의 소수자로 강파르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역할을 합니다. 이루고 싶은 목표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은 지금까지의 그들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힘을 길러 줍니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성찰의 학문입니다. 나는 누구인지, 내가 속해 있는 사회는 어떤 곳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학문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자연스레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희망의 다른 이름은 욕망입니다. 인문학을 통해 사람들은 ‘어떻게 욕망하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이죠. 돈, 주상복합 아파트, 건강 등등 욕망의 대상이 무한대로 발산하는 요즘 세상에서 자신이 진짜로 욕망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나의 욕망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욕망은 마치 밀림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수풀과도 같습니다. 어지러이 얽혀 있어 길을 찾을 수 없게 합니다. 무한한 욕망의 밀림에서 헤매고 있을 때 수풀을 쳐내고 길을 내는 것이 인문학이라고 할까요. 인문학을 배우며 사람들은 인생의 길을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자신만의 길을 꿋꿋이 걸어 나아갈 힘이, 인문학을 통해 생긴 거지요.

 

 인문학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길러 줍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문득 깨우치게 합니다.


인문학은 위기의 학문이 아니라 희망의 학문이었다

그런 제 추측은 기사를 쓰기 위해 성프란시스대학 2기 졸업생들을 인터뷰하며 굳어졌습니다. 인문학 공부를 하면서 어떤 부분이 자신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들어보고 싶어서 추진한 인터뷰였는데요. 노숙 생활을 했던 과거가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인터뷰를 거절할 거란 제 예상과 달리 이분들은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 주셨습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진중하게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대화 중간 중간 공자나 마르크스 등 유명한 철학자들의 예를 드는 것도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노숙을 하면서 가족들과 연락도 끊고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았다는 허문종 씨는 성프란시스대학 2기를 수료한 뒤 방송통신대 입학을 앞두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는 “철학 수업에서 동료들과 토론을 하며 인생을 다른 각도로 보는 법을 배우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에는 회한밖에 없지만, 이제 미래에 대한 생각이 채워지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마흔이 넘은 나이지만,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도 서서히 든다고 했습니다. 노숙인 출신으로 직업을 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옛날처럼 쉽사리 포기하고 인생을 낭비하진 않겠다는 것이 허문종 씨의 다짐이었습니다.

이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인문학 특유의 ‘성찰의 힘'이 아닌가 합니다. 인문학은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외연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 글

김민희 / 서울신문 기획탐사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