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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8. 3. 23:09

추억하고 싶은 것들 3

추억하고 싶은 것들 - 한때는 ‘잘나갔던’ 지난 시절의 대표 업종들

어린 시절엔 왜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았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양조장에 가서 술을 받아 오면서는 술맛이 궁금해 술주전자를 홀짝이기 일쑤였고,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라고 약장수가 외치는 곳이면 어떻게든 그곳을 기웃거려야 직성이 풀렸다. 뻥튀기 기계 앞에서는 또 어떻고. 언제 '펑' 터질지 몰라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귀를 막은 채 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던 재미는 남달랐다. 그때 우리들의 유년시절을 봄날처럼 따스하게 만들어 주던 그 풍경들, 그 가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대장간 _ 농경사회를 떠받치던 풍경

 

1980년대 이전만 해도 웬만한 동네에 하나씩은 있던 대장간.
못 쓸 것 같았던 낫이나 칼도 대장장이의 손을 거치면 신기하게도 새것처럼 씽씽해졌다.

땅땅땅땅! 치익치익~ 대장장이가 쇠를 어르는 장면은 마술처럼 신기했다. 이가 빠지고 닳아서 못 쓸 것 같았던 낫이나 칼이 대장장이의 손을 거치면 날이 씽씽하게 선 새것이 되었다. 쇳덩어리가 온갖 도구로 변신하는 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1980년대 이전만 해도 어지간한 동네에는 대장간이 있었다. 보통 동네 들머리의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집에서 쓰는 칼에서부터 쟁기의 보습까지 온갖 도구와 농기구가 그곳에서 만들어졌다. 농경사회에서 대장간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대장간의 구조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한쪽에 화덕이 자리 잡고 그 옆에는 풀무, 가운데에 메질을 하는 모루가 있었다. 화덕에 쇠를 넣고 풀무질을 해서 벌겋게 달궈지면 모루 위에 얹어 놓고 쇠메를 내리쳐 모양을 만들어 나갔다. 메질을 어느 정도 하면 물에 담그고, 식으면 다시 화덕에 넣어 풀무를 돌리고…. 그런 과정을 반복해서 원하는 모양이 되면 숫돌에 갈아 날을 세우고 자루를 끼워 완성했다. 없어서는 안 될 것 같았던 대장간도 농경사회가 무너지면서 하나 둘 사라져 갔다. 화덕과 풀무가 있던 자리엔 잡초만 무성하고, 농촌은 갈수록 쓸쓸해지고 있다.


전당포 _ 딱하고 애절한 사연 줄 잇던 곳

 

가난한 시절의 상징이었던 전당포. 시대가 바뀐 요즘에는 명품 전용 전당포가 성업 중이라고.

아이를 업은 여자가 전당포 앞에서 서성거린다. 손가락에 자꾸 시선이 간다. 남편이 집을 떠난 지 벌써 여러 달이 되었다. 돈을 벌어 오겠다고 떠났지만 소식조차 없다. 아이가 며칠 전부터 열이 나고 아프다. 젖도 나오지 않는데 분유마저 떨어졌다. 망설이던 여자가 결심을 한 듯 전당포 문을 민다. 한참 뒤 나오는 그녀의 손에는 가락지가 없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물건을 맡기고 돈을 빌리는 곳이 전당포다. 지금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물지만, 전에는 딱하고 애절한 사연이 줄을 잇던 곳이다. 가세가 기운 집이 패물이나 옷을 하나씩 맡기다가 결국 이불까지 메고 가던 곳이 전당포다. 가난한 고학생이 피눈물을 흘리며 책을 들고 가기도 했다. 대학생들이 막걸리 값 마련을 위해 시계를 맡기던 것은 치기에 가까웠다.
지금도 전당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하지만 예전의 그 전당포는 아니다. 요즘은 ‘명품족'이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쓰다가 싫증 나면 맡기고 다른 것을 산다는 것이다. 품목도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고가의 골프채 등을 들고 오는 사람도 꽤 많다는 것이다. 카지노가 있는 정선 사북에 가면 전당포 간판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도 색다른 풍경이다.


떠돌이약장수 _ 현란한 말솜씨로 장꾼들의 발길 잡은 쇼! 쇼! 쇼!

 

약장수가 파는 약만 먹으면 못 낫는 병이 없을 것 같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약장수는 시골 장터 최고의 스타였다.

자아~ 자아~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떠돌이약장수는 5일장의 명물이었다. 장이라는 게 옷장수도 어물전도 없어서는 안 되지만, 떠돌이약장수가 빠지면 새알심 빠진 팥죽처럼 허전하기 마련이었다. 장날이면 떠돌이약장수들은 한쪽에 전을 펴고 현란한 말솜씨로 장꾼들의 발길을 잡았다.
약장수도 등급이 있었다. 쇼나 차력으로 사람을 모으는 약장수들은 제법 인기가 좋아서 꽤 큰 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럴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은 원숭이라도 내세우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도 저도 능력이 안 되는 ‘나홀로약장수들'은 오로지 입심으로 약을 팔았다. 파는 약은 다양했다. 고약, 무좀약, 위장약, 두통약에 모든 병이 싹 가신다는 만병통치약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중에는 정말 병을 낫게 하는 약도 없지 않았겠지만, 대부분은 그렇고 그런 재료로 조악하게 만든 것들이었다.
그래도 쏠쏠하게 팔렸다. 화려한 언변에 녹아서 고추 판돈을 몽땅 주고 약을 사 들고 갔다가 아무 효험도 못 보고 땅을 치는 촌부도 있었다. 떠돌이약장수들도 세월 따라 장터를 떠났다. 그래서 그런지 시골장도 예전만큼 흥겹지 않다.


양조장 _ 술 익는 마을마다 넘치던 흥겨움

 

막걸리는 시골 잔치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음식'이었다.
또 사회에 막 눈을 뜨기 시작한 대학생들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 한가운데에 양조장이 있었다.

1960~70년대 양조장은 소위 ‘잘나가는 업종' 중 하나였다. 막걸리의 수요는 늘었지만 허가는 제한돼 있어서 독점의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아무리 가난해도 술이 없으면 판이 성립되지 않는 게 우리 민족이었다. 일을 하다가도 새참 때가 되면 막걸리타령이 절로 나왔다. 풋고추나 신 김치 한 점에 막걸리 한 잔 들이켜야 힘이 솟았다.
동네에 잔치가 벌어지면 양조장은 더욱 분주해졌다. 학교 운동회는 물론이고 윷놀이 같은 놀이판에도 막걸리가 있어야 흥이 났다. 철철 넘치는 잔으로부터 인심이 나왔다. 그때는 젊은이들도 막걸리를 많이 마셨다.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암울한 현실에 울분을 토하고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기도 했다.
한때는 전국에 2500개가 넘는 양조장이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막걸리도 세월의 거센 파도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수요가 줄기 시작하더니 계속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농으로 농촌이 비어 가고 기계화에 따라 협동농업이 사라짐에 따라 마실 사람이 줄어든 게 결정적 이유였다. 막걸리를 대신할 수 있는 술과 음료가 쏟아져 나온 것도 한몫을 했다. 지붕에 풀이 돋고 기둥이 삭아 내리는 양조장이 갈수록 늘어났다.


염전 _ 이제는 거의 사라진, 바다와 해와 그리고 기다림의 詩

 

소금을 만드는 데는 바닷물과 햇볕 그리고 무엇보다 염부의 땀이 절대적이다.
값싼 중국산 소금에 밀려 이제 염전도 사라져 가고 있다.

소금을 만드는 과정은 땀과 기다림의 연속이다. 바닷물을 둠벙(저수지)에 가뒀다가 염도가 적당해졌다 싶으면 빛 좋은 날 넓은 밭(염전)으로 끌어올린다. 내리쪼이는 한여름의 햇살에 바닷물은 서서히 졸아든다. 결국 진득한 소금물이 되었다가 육각의 결정체로 태어난다. 그들이 모여 하얀 소금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말로 하면 소금을 만드는 과정이 간단한 것 같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으랴. 바닷물과 햇볕만 있다고 소금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염부의 속 졸이는 기다림과 땀이 함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졸이고 소금을 거둬 창고에 쌓기까지, 염부는 온몸을 뜨거운 태양 아래 고스란히 내맡겨야 한다.
국내에 천일염이 시작된 것은 1907년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바닷물을 솥에 넣고 끓이는 '전오염(煎熬鹽)제조법'으로 소금을 만들었다. 하지만 절대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수입해서 썼다고 한다. 염전 역시 자꾸 사라져 가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중국산 싼 소금에 뒷덜미를 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다 바닷물이 하얀 소금으로 바뀌는 그 경이로운 과정을 실험실에서나 보는 게 아닐지 걱정된다.


뻥튀기장수 _ 동심의 세계로 가는 타임머신 조종사

 

'펑' 소리는 무서웠지만, 아이들은 뻥튀기 기계 앞을 떠날 줄을 몰랐다.
이제는 아이들은 없고 비닐봉지에 담아 놓은 튀밥들이 그 자리를 지킨다.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던 시절에 뻥튀기야말로 최고의 군것질거리였다. 뻥튀기장수가 동네에 들어와 자리를 펴면 아이들은 엄마를 졸라 쌀이나 보리, 옥수수, 콩 등을 얻어 냈다. 아저씨에게 곡식자루를 내밀면 깡통에 받아 뒀다가 순서대로 뻥튀기 틀에 넣고 돌렸다. 기계가 어느 정도 가열되면 둥그런 망을 댄 뒤, 뻥이요~ 하고 외쳤다. 그러면 아이들은 귀를 막고 주춤주춤 물러섰다. 잠시 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솟고 엄청나게 불어난 튀밥이 쏟아졌다.
뻥튀기는 튀밥ㆍ광밥ㆍ깡밥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원리는 비교적 단순했다. 곡물을 넣고 밀폐한 뒤 서서히 가열하면 압력이 올라간다. 압력이 적절한 단계에 도달했을 때 뚜껑을 갑자기 열면 압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곡물이 부풀어 오른다. 훨씬 뒤에 등장한, 둥그런 쌀과자에 ‘뻥튀기'란 이름을 내주기도 했지만 뻥튀기는 튀밥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요즘도 5일장에 가면 가끔 뻥튀기장수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옛날의 그 모습은 아니다. 무엇보다 반짝이는 눈으로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대신 허리 굽은 촌부들이 비닐봉지에 담아 놓은 튀밥을 사 간다. 빛 바랜 사진처럼 쓸쓸한 풍경이다.


- 글

이호준 / < 사라져 가는 것들, 잊혀져 가는 것들 >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