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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8. 3. 23:10

추억하고 싶은 것들 4

추억하고 싶은 것들 - 그 시절 우리 삶의 ‘프로그램’이었던 생활 풍습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삶과 죽음은 일상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자연스런 풍경이었다. 대문에 걸린 노란 금줄을 보며 이웃집에 새 생명이 태어난 걸 알았고, 담장 너머 둥둥 떠가는 꽃상여를 통해 동네 어르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동네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제 일처럼 나섰고, 그렇게 서로 돕는 마음은 슬픔마저도 정화하는 힘이 되었다.

전통혼례, 전통장례, 굿, 금줄, 서낭당… 이제는 민속촌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풍경이 되어 버린 우리의 생활 풍습들. 


전통혼례 _ 두 사람이 하나 되는 날에 온 동네가 잔칫집

 

한 집에 혼사가 있으면 마을 전체가 들뜨게 마련이었다. 아낙네들은 잔칫집에 모여 전을 부치고 떡을 하느라 종종걸음 쳤다. 사내들은 바깥마당에서 돼지를 잡고 아이들은 그 주변을 맴돌았다. 혼례식은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치렀다. 옛날에는 대례를 치르고 짧게는 3일, 길게는 첫아이를 낳을 때까지 처가에 머물렀다고 한다.

신랑이 도착해서 혼례청에 들어서면, 주례를 맡은 동네 어른이 식을 이끌어 갔다. 신랑이 기러기를 드리는 전안례, 신랑 신부가 손을 씻은 다음 맞절을 하는 교배례 순으로 진행됐다. 신랑 신부가 표주박을 둘로 나눈 잔에 술을 따라 마시는 합근례, 하객과 어르신들께 감사의 절을 올리는 보은보배를 마치면 주례의 덕담과 함께 식이 끝났다.

식이 끝나면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마당에 깔린 멍석 위로 상이 놓이고 술잔이 질펀하게 오고 갔다. 잔치는 밤이 이슥하도록 계속됐다. 청년들은 자기 동네 처녀 데려간다며 ‘신랑 길들이기'를 시작하고, 장모는 귀한 사위 살살 다뤄 달라고 술상을 들이고…. 신랑 신부가 신방에 들어도 시련은 남아 있었다. 불이 꺼지면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가 창호지에 구멍을 내는 아낙들의 장난기 가득한 눈…. 그렇게 혼인날의 밤은 깊어 갔다.


서낭당 _ 마을의 안녕과 길손들의 소망을 지킨 마을의 수호신

 

어느 정도 규모의 마을에는 서낭당이 하나씩 있었다. 마을과 토지를 지켜 준다고 믿었던 존재가 서낭신인데, 그 서낭신이 붙어 있는 나무나 돌무더기를 서낭당이라고 했다.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서낭신이 머물 사당을 짓기도 했다. 이를 당집이라고 불렀다. 서낭당은 마을의 안녕을 지켜 주고 잡귀나 병을 막아 주는 역할 외에도 멀리서 돌아오는 가족을 마중하고, 떠나는 가족을 배웅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동네를 지나던 나그네가 서낭당을 만나면 돌을 하나 얹거나 침을 뱉었다. 돌을 얹는 것은 원하는 것이 이뤄지도록 해 달라고 염원하는 의식이며, 침을 뱉는 것은 길 위를 떠도는 악령의 해를 막기 위한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해마다 정초가 되면 서낭당에 왼새끼로 꼰 금줄을 쳐서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했다. 그리고 마을에 불행한 일이 닥치지 않도록, 농사가 풍년이 들도록 기원하는 제를 지냈다.

농촌에서조차 서낭당을 보기 힘들게 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길을 넓힌다는 명분으로 아름드리 당나무가 뽑혀 나갔고 돌무더기가 사라졌다. 또 '미신(迷信) 타파'라는 이름으로 공개재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오랜 세월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했던 서낭당은 그렇게 하나 둘 사라져 갔다.


품앗이 _ 막걸리 몇 잔에 마음까지 넘쳤던 노동의 즐거움

모내기철이 되면 마을마다 활기가 넘쳤다. 어제는 철수네, 오늘은 순희네, 내일은 광철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돌아가며 모내기를 했다. 그런 날의 들판은 제법 흥겨웠다. 아무리 가난해도 모를 내는 집은 들밥을 풍성하게 차려 내오게 마련이었다. 막걸리 몇 잔과 빈 논이 줄어드는 재미에 취한 사람들은 힘든 줄 모르고 일을 했다. 그게 바로 품앗이의 힘이었다.

품앗이는 다른 가족의 노동력을 빌려 쓰고, 그 집에서 필요할 때 노동력으로 돌려주는 것을 말한다. 모내기뿐 아니라 김매기, 가을걷이, 이엉 올리기, 퇴비 만들기 등도 품앗이가 많이 이뤄졌다. 같이 일을 함으로써 협업의 효과도 보고 동네 사람끼리 우의도 다졌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일손을 주고받는 것도 일종의 품앗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품앗이가 '준 만큼 받는다'는 식의 타산적 교환은 아니었다. 즉, 장정의 노동력을 빌렸다고 똑같이 갚아야 되는 건 아니다. 여성이나 아이들의 노동력으로 되갚는다고 불만스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의 부재로 일손이 부족한 집안을 돕는다는 뜻도 품고 있었다. 요즘은 품앗이하는 장면을 보기 어렵다. 품앗이를 할 만한 사람도 없지만, 노동의 대가를 돈으로 지불하는 방식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편리해지는 만큼 삭막해지는 게 세상이다.


굿 _ 인간의 소망과 하늘의 뜻을 연결하던 종합예술마당

 

"건넛마을 박주사네 딸이 신기가 있다네. 꽤 오래 앓는다 했더니, 결국 내림굿을…." 어른들이 흔히 주고받던 말이다. 과거에는 내림굿이 제법 흔했다. 별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거나 환청ㆍ환영에 시달리면 무병(신병)을 앓는다고 했는데 내림굿을 해야 나았다. 그렇게 내림굿으로 무당이 된 사람을 강신무(降神巫)라고 불렀다.

굿은 무당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신에게 기원하는 의식을 말한다. 보통 병을 고치기 위한 주술적 행위로만 알고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나라와 집안의 평안을 위해서나 조상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해 굿을 했고 풍년을 기원하기도 했다. 동네의 복을 비는 복굿, 비가 내리게 해 달라는 기우제굿도 있었다. 굿판이 벌어지면 동네 전체가 들썩거렸다. 굿은 춤ㆍ음악ㆍ연극ㆍ미술ㆍ문학이 한데 어우러진 종합예술이기도 했다.

한때는 무당을 혹세무민하는 사람들로, 굿을 타파해야 할 미신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당은 인간의 소망을 하늘에 전하고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내려 주는 메신저였을 뿐이다. 또 굿은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마당이었다. 무조건 죄인처럼 배척한 건 안타까운 일이다.


전통장례 _ 이승 떠나는 이에게 바치는 산 자의 아름다운 인사

혼인이 그러하듯, 초상 역시 마을사람 모두가 함께 치르는 행사였다. 어디 어디의 누가 세상을 달리했다 하면 부르지 않아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장례절차가 척척 진행되었다. 예(禮)를 잘 알고 주선력이 있는 어른 하나가 호상을 맡아 상주를 돕고 장례를 이끌었다.

사실 지휘하는 사람이 없어도 모든 절차는 각본이 있는 것처럼 돌아갔다. 사내들은 마당에 차일을 치고 멍석을 까는 것은 물론, 가마솥을 걸고 나뭇짐을 져 날랐다. 아낙네들은 국을 끓이고 전을 부치고 밥을 안쳤다. 오케스트라처럼 정교하게 손발이 맞았다. 조금 과장하면 상주들은 곡을 하고 문상객만 맞으면 될 정도였다.

밤이면 마당에 화톳불이 놓아지고, 밤샘하는 사람들은 한쪽에서 투전이나 화투판을 벌이기도 했다. 발인을 하는 날이면 몇몇 사람은 산역을 위해 미리 장지로 가고 몇은 상여를 내어 정성껏 꾸몄다. 여인들의 애절한 곡을 뒤로하고 정든 집을 떠난 상여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장지로 향했다. 요즘은 농어촌에서도 장례를 병원이나 장례식장에서 치른다. 편한 세상인 건 분명한데 무언가 허전하다는 생각은 버리기 어렵다.


금줄 _ 삼가고 조심해야 할 우리네 인생을 닮은 생명 줄

 

과거에는 길을 걷다가도 금줄이 보이면 절로 발이 멈춰졌다. 금줄은 부정한 것을 막기 위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걸어 매는 줄이다. 금줄의 안쪽은 성스러운 장소라는 걸 의미한다. 아기를 출산했을 때뿐만 아니라 서낭당처럼 신성한 곳임을 표시하는 곳에도 금줄을 쳤다. 또 가축이 새끼를 낳거나 장을 담글 때, 동제(洞祭)를 지낼 때도 금줄을 걸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맨 먼저 왼새끼를 꼬아 대문의 양쪽 기둥에 매달았다. 금줄이 걸린 집에는 동네 사람은 물론 가까운 친척도 21일(삼칠일) 동안 출입을 할 수 없었다. 금줄로 사람의 출입을 막는 것은 부정을 타지 말라는 주술적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저항력이 약한 신생아를 질병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지혜이기도 했다.

사내아이를 낳았을 때는 금줄에 솔가지와 숯ㆍ빨간고추를 달았고, 여자아이일 경우에는 솔가지와 숯만 끼웠다. 고추를 단 것은 아들을 낳았다는 걸 자랑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늘 푸른 솔가지는 생명을 상징하고, 숯은 부정을 물리치고 정결하게 한다는 뜻이 있다.

시골에 젊은이가 사라지고 도시에 아파트문화가 정착되면서 금줄도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삼가고 조심하기 위한 것'이라는 본래의 뜻만큼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 글

이호준 / <사라져 가는 것들, 잊혀져 가는 것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