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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7. 30. 08:09

역사 속 통섭의 대가, 홍대용

[역사 속 통섭의 대가, 홍대용] 축적된 지식을 직조하라, 새로운 세상이 보이나니!

국사시간에 들어 봤음직한 담헌 홍대용. 하지만 우리가 홍대용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가 조선후기의 실학자라거나 과학사상가라는 것 정도다. 그런데 오늘날 얘기되고 있는 통섭의 뿌리는, 지금으로부터 몇백 년 전에 살았던 홍대용에 가 닿는다. 심지어, 중국에서 새로운 문물을 배우고 돌아와 박지원ㆍ박제가 등의 학자들과 교우하며 연구하는 모습은, 오늘날의 통섭학자들을 연상시킨다.

그러고 보면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다방면에 걸쳐 섭렵하는 자세는, 분명 새로운 세계를 여는 시작일 수 있다. 직장생활을 하는 우리가 가져야 할 궁극적인 자세도 결국 '통섭'에 있는 건 아닐까. 


조선을 지배한 성리학 패러다임, "당연이 본연이고, 자연이 본연이면, 당연은 자연"


우리는 조선왕조를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지배한 사회라고 정의하는데 동의한다. 그만큼 성리학이란 용어는 우리에게 익숙한 편이다. 그런데 성리학이 도대체 어떤 철학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하기 어렵다. 그저 충(忠)ㆍ효(孝)ㆍ열(烈)을 강요한 지배철학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맞는 말이지만, 성리학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려면 충효열을 강요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성리학자들은 인간은 ‘도덕적 본성(本性)'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한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받는 자연의 법칙이다. '천리(天理)'라고도 한다. 인간의 도덕적 본성은 자연의 법칙, '천리(天理)'인 셈이다. 이를 ‘本性즉天理'로 압축하고, 다시 ‘性즉理'로 줄인 것이 바로 성리학이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일은 ‘저절로 그러한' 자연(自然)의 현상이다. 작위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을 우리는 자연이라고 부른다. 본래 그런 것이다(本然).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當然)하다.

마땅히 그래야 할 도덕이나 규칙들을 오랜 시간 반복하다 보면 습관이 되어 원래부터 그런 것으로 생각한다. 거짓말을 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 역시 당연하다. 때문에 본래부터 거짓말을 하는 일은 나쁘다는 생각이 든다. 마땅히 지켜야 할 것들이 오랜 시간 누적되어 본래 그러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로써 당연(當然)이 본연(本然)이 된다.

당연(當然)이 본연(本然)이고, 자연(自然)이 본연(本然)이면, 당연(當然)은 자연(自然)이 된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자연의 법칙이 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장면을 목격한 후의 측은한 마음은 인간의 생래적 본성이지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거나 혹은 배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의 위급한 장면을 보고도 구하려는 마음이나 슬픈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그녀)는 인간이 아닌 금수가 된다.

 

 성리학은, 인간의 도덕적 본성은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자연의 법칙과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니,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의 도덕률이 엄격했음은 물론이다.

성리학은 인간이 지켜야 할 당연(當然)의 도덕률을 저절로 그러한 것[自然]이며 동시에 원래부터 그러한 것[本然]으로 일치시킴으로써 당연의 도덕적 가치를 회의하거나 부정할 수 없도록 하였다. 요컨대 당위[value]를 자연의 사실[fact]로 일치시킨 것이다.


성리학의 균열, "도덕은 인간의 생래적 본성이 아니라 길러진 본성이다"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타고난 ‘도덕적 본성(대개는 사회적 규칙)'이 실은 ‘길러진 본성'이라는 의심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다만 이단(異端)의 도전을 억압하는 사상통제로 인해 성리학의 이데올로기를 드러내 놓고 회의하지 못할 뿐이었다.

그러나 양란 이후 조선의 일부 학자들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도덕=자연'의 도식을 본격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계곡(谿谷) 장유(張維, 587∼1638)는 “물고기나 거북이는 깊은 물속을 자연스럽게 헤엄치지만 사람은 빠져 죽고, 개와 돼지는 똥을 자연스럽게 먹지만 사람은 코를 막고 불결하게 여기며, 추운 곳에서는 버림받는 물건도 더운 곳에서는 환영받는 경우가 있는 법”이라면서, 성리학의 도덕률이 ‘자연'의 절대 법칙으로 삼아 삶을 억압하는 태도를 비판하였다.

허균은 도덕이란 단지 성인이 만들어 교육하여 '본성'이 되었을 뿐, 실제 인간의 본성은 식욕과 색욕일 뿐이라며 도발적인 언급을 서슴지 않았다. “식욕과 성욕은 본성이니 사람으로 태어나서 낮에 두 끼 못 챙겨 먹고, 밤에 예쁜 여자 하나 없다면 어찌 사람의 직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정욕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인데 여색을 절제하여 마음을 속여서야 되겠는가.” 이제 사람들은 욕망의 투사를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라 여기게 되었다.

도덕을 목적으로 삼는 성리학의 방법들(성인의 가르침)이 부정되면서,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도 용납될 수 있다는 생각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는 목적을 위해서는 선한 수단만이 정당하다는 생각으로부터, 목적을 위해 선하지 않은 수단도 정당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다가 더욱 문제를 어렵게 만든 것은 두 차례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성리학[性卽理]이 현실에서 드러낸 도덕적 무력함과 위선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조선의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청국으로 끌고 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청군은 납치한 부녀자들을 말에 태우고는 그 남편으로 하여금 말을 끌고 가도록 명령하였다.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편은 부녀자에게 자진(自盡)을 요구하였다. 절개를 지키지 못한 채 끌려가는 부녀자를 질타한 것이다. 이에 말 등에 타고 있는 부녀자 역시 청군에 대항도 못 한 채 묵묵히 말을 몰고 가는 남편에게 자결을 권하였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욕설로 이 상황을 마감한다.

성리학적 도덕 본성이 사실[자연의 법칙]이라면 모두 죽어야 했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점차 도덕에 대한 회의와 의심은 커져 가는 반면에, 시세(時勢)와 현실이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 갔다. 도덕은 인간의 생래적 본성이 아니라 길러진 본성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 동안의 지식체계들을 정리하고 질서 지웠던 성리학의 가치 체계는 이전만큼 확고하게 기능하지 못했다. 도리어 시세나 풍습, 그리고 오래된 전통의 누적된 효과를 본성으로 인정하는 사고들이 꿈틀거렸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관심 밖이었던 것들이 '지식'의 대상으로 전환 

성리학의 절대 도덕을 비판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타진하는 사고의 출현이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상대주의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특히 기왕(旣往)의 고집과 편견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일깨워 주었다. 조선 성리학의 정통성과 절대성에서 비롯하는 아집과 권력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었다.

기왕의 절대적인 기준을 강력하게 회의함으로써 그 동안 인간 중심의 기준[성리학]에서는 발견될 수 없었던 다양한 가치들이 제 나름대로 ‘가치'를 부여받게 된 것이다. 내(인간)가 중요한 만큼, 사물도 중요한 법이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고 하찮은 것이 없으며 가짜이거나 허하거나 한 것도 없다. 모두가 있는 그대로,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그 동안 관심 밖이었던 모든 것들이 ‘지식'의 대상으로 전환되었다. 이들을 관찰하고 탐구하여 새로운 체계를 세우려는 노력들이 경주되었다. 당시 조선학자들은 이러한 태도를 '진정한 앎:眞知'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불교도 유교도 의학도 생물학도 심지어 중국으로부터 들여오고 있는 서양의 학문도 이제는 새롭게 지켜보고 탐구할 대상이 되었다.

 

 홍대용의 글씨(사진 출처:한국브리태니커).
홍대용은 조선후기에 새로운 가치들이 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홍대용, "월식은 땅의 거울, 월식을 보고도 땅이 둥근 줄 모르겠느냐?"
 

그들에게 지식의 경계는 정해진 바가 없었으며, 나아가 선입견 없는 학문만이 사물을 진정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담헌 홍대용(1731~1783)은 기왕의 선입견과 편견을 벗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탐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기왕의 틀에 사로잡혀 있다면 단지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네모'질 뿐이다. 홍대용은 선입견을 가진 자들이야말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달이 해를 가릴 때 일식(日蝕)이 되는데 가려진 몸체가 반드시 둥근 것은 달의 몸체가 둥근 때문이며, 땅이 해를 가릴 때 월식(月蝕)이 되는데 가려진 몸체가 또한 둥근 것은 땅의 몸체가 둥글기 때문이다. 그러니 월식은 땅의 거울이다. 월식을 보고도 땅이 둥근 줄을 모른다면 이것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추면서 그 얼굴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어리석지 않느냐?”

기왕의 가치 기준이 흔들리면서 새로운 가치들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펼쳐졌다. 중국이 소중하듯 조선도 소중하고 일본도 소중하였다. 인간이 소중한 만큼 초목도 소중하였다. 아름답고 아름답지 않다는 기준도 사라지고 똥도 향기롭고(穢德先生傳), 양반이 못 할 일도 없다(兩班傳).

이전에 지식이 아닌 것들이 지식이 되거나, 지식이었던 것들이 지식의 영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지식이 무엇인지, 지식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찮은 것과 중요한 것의 구분, 인간과 자 연의 구분, 중화와 이적의 구분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무엇이 중화(中華)인지, 중요한지, 가치 있는지 역시 알기 어렵게 되었다.

 

 홍대용은 달에 비친 지구의 그림자를 보고 지구가 둥근 것을 안 선각자였다.
기존의 틀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저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네모난 것이었으리라.


지식의 양적 폭발, 통섭을 준비하다

조선 지식사회의 지형이 변화되었다. 학인(學人)들이 사용하는 '문장'에는 어떠한 속어(俗語)도 여과 없이 표현되었다. 과거의 지식들 사이로 새로운 지식들이 발굴되고 유통되었다. 기왕의 권위는 해체되고 새로운 권력이 그 틈 사이로 용솟음쳤다. 엄숙한 도덕률이 사라지자 욕망이 분출되었다.

남성의 유일함이 흔들리자 여성의 생활들이 주목되었다. 도덕과 윤리학의 시대가 가면서 일상과 일용(日用)의 풍속이 발견되었다. 민중들의 삶이 관찰의 대상으로 화폭에 옮겨졌다. 바느질과 요리, 나아가 임신과 출산ㆍ육아의 지식들이 의미 있는 정보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조선의 지식사회가 변하게 된다.
홍대용이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대용의 사상과 저서들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한다.

조선후기는 성리학만을 고집하던 시대가 아니었다.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한 지식이 탐구되었다. 기왕의 패러다임을 성찰하는 데서 출발한 '眞知'의 노력은 단지 여러 가지 지식들이 나열되거나 쌓여 있는 데 머물지 않았다. 지식의 양적 폭발이 현실화되자 질적 전환인 '통섭'이 준비된 것이다. 올바른 가치판단의 토대 위에 다양하게 축적된 지식을 직조(織造)하는 작업으로 새로운 학문적 통섭은 현실화되고 있었다.


- 글

김호 /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한국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