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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8. 3. 23:04

추억하고 싶은 것들 1

추억하고 싶은 것들 - 그 옛날 우리들의 동반자였던 생활 소품들

추억은 빛 바랜 사진 속에만 있지 않다. 가끔 사는 일이 힘들고 지칠 때 추억은 우리 곁에 다가와서 가만가만 등을 토닥여 주고 간다. 오랜만에 둘러앉은 형제들과 어린 시절의 잊혀진 시시비비를 다시 가리거나, 이제는 제법 나이 든 티가 나는 옛 친구들과 까마득한 학창시절을 얘기하다 보면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 시절 우리 생활의 필수품이었던 것들에 대해 한 번쯤은 이렇게 경의를 표해도 좋으리라. 자~ 초등학교 때 쯤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양은도시락 _ 우리들의 행복했던 점심시간

딸랑 딸랑~ 딸그락 딸그락~ 하굣길의 빈 양은도시락 소리는 세월이 흘러도 엊그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다. 어려웠던 시절엔 도시락이 빈부를 가르는 상징이기도 했다.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한 아이들은 점심시간이 되면 슬그머니 나가 물로 빈속을 채웠다. 도시락 하나 채울 양식에 시래기나 나물을 넣고 끓여 온 가족이 한 끼 식사를 해결하던 때였다. 보릿고개는 늘 높고 꺼진 배는 늘 깊었다.
혼식을 의무화하던 시절, 학교에서는 도시락 검사를 했다. 하지만 ‘자식 사랑이 넘쳐흐르는' 부잣집 엄마들은 쌀밥만 싸 줬다. 보리를 섞어 달라고 졸라도 막무가내였다. 교실에서는 부잣집 아이가 가난한 집 아이에게 보리알을 빌리러 다니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겨울이면 난로 위에 탑이 쌓였다. 도시락을 난로에 얹어 놓으면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밥이 눋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밑에 놓겠다고 다투기도 했다.

 

도시락은 옹기종기 둘러앉아 먹는 맛이 각별했다. 반찬이라야 김치ㆍ장아찌나 잘해 봐야 콩장ㆍ멸치볶음이었지만 왜 옆자리의 반찬이 더 맛있어 보이던지. 김치 국물이 배어든 책은 항상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하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에 흉이 될 것도 없었다. 급식시대인 지금,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수동타자기 _ 지금의 컴퓨터를 능가한 최고의 문서작성 도구

타자기 하면 흰 블라우스에 단정한 치마를 입고 타이핑을 하는 여사무원이 연상된다. 어느 땐 경쾌한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타닥 타닥 타다닥…철걱철걱…. 잘 치는 타자 소리는 타악기 소리처럼 리듬이 있었다. 지금은 고물상 뒷방지기로 전락했지만 타자기는 한때 문서작성 도구의 총아였다.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라는 사실 역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타자가 그리 만만한건 아니었다. 수동타자기는 지우거나 저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틀리면 수정액으로 고치거나 처음부터 다시 쳐야 했다. 또 리본에 글쇠를 때려 글자를 만드는 방식이기 때문에 자판이 깊고 무거웠다. 컴퓨터처럼 적당히 주물러(?)서는 글자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배울 땐 문서 하나 만들다가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서양에서는 타자기가 맹인을 위한 도구로 발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1914년 이원익이 개발한 타자기가 최초였다. 그 뒤 1949년에 치과의사 공병우가 만든 '공병우 타자기'가 첫 실용 타자기가 되었다. 한 시대를 주름잡던 타자기도 시간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전동타자기와 워드프로세서에게 밀리더니 컴퓨터의 등장 이후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조리 _ 섣달 그믐 골목길에 울려 퍼지던 "조리 사려~"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다. 요즘이야 쌀에서 돌을 골라내고 팔기 때문에 조리질을 할 일이 없지만 전에는 밥을 그냥 지으면 우지끈!! 돌을 씹기 일쑤였다. 그러잖아도 시원찮은 시아버지의 치아를 그렇게 망가뜨리면 며느리는 쥐구멍을 찾아도 모자랄 수밖에.

그래서 조리는 오랜 세월 부엌의 필수품이었다. 대조리가 세월 따라 플라스틱이나 철망으로 대체되는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고 복조리만 남았다.

복조리는 쌀을 일듯 복을 일고 오복(五福) 중 하나인 치아를 보호한다는 의미로 그리 부른다. 전엔 섣달그믐부터 초하루 새벽까지 “조리 사려~ 조리 사려~” 외치며 복조리 장수가 골목을 누볐다. 그러면 집집마다 조리를 몇 개씩 사서 방 귀퉁이나 대청ㆍ부엌 등에 걸어 두었다. 복을 깎는 거라 해서 복조리 값은 깎지도 않았고, 무를 수도 없었다. 조리는 산죽(山竹)을 엮어서 만든다. 대를 삶아 말려 껍질을 벗긴 뒤 잘게 쪼개서 물에 담갔다가 엮는다. 쌀을 담는 ‘바구니' 부분은 움푹하게 엮으며 쥐기 좋도록 자루를 만든다. 요즘도 복조리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나마도 중국산에 밀린다고 한다. 세월이 무상함을 새삼 안타까워할 뿐이다.  


주판 _ 까까머리에 드르륵 내리그으면 눈물 핑 돌던…

“1에 7이요… 3에 8이요….” 주산시간에 선생님이 숫자를 불러 주는 소리는 특유의 가락이 있었다. 주판은 긴 세월 동안 계산기의 대명사였다. 주산교육이 본격화되기 시작된 1960년대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1980년대까지 등굣길에 주판을 들고 가는 아이들은 드물지 않았다. 저학년 교실에서 또각또각 나던 소리는 고학년 교실로 갈수록 따다다닥 따르르… 듣기 좋게 바뀌었다.

 

상업고등학교에서는 주산이 정규과목 중 하나였다. 주산을 잘하면 은행 같은 금융기관에 수월하게 들어가 부모들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다. 나라에서도 주산을 특기교육의 하나로 장려하여 1960년대부터 정부검정을 실시했다.
주판은 때로는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기도 했다. 흔들면 자르륵~ 자르륵~ 나는 소리는 노래의 장단을 맞추는 데 그만이었다. 개구쟁이들은 주판을 스케이트 삼아 타고 놀다가 선생님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주판을 까까머리에 대고 드르륵 내리그으면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핑 돌았다. 전자계산기가 일반화된 지금, 구멍가게에서 돋보기를 쓰고 주판알을 튕기던 영감님의 모습은 옛 얘기가 되었다.


키 _ 어머니와 소금, 그리고 부지깽이

‘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이른 아침 대문가를 얼쩡거리던 이웃집 오줌싸개의 얼굴이다. 전에는 아이들이 오줌을 싸면 키를 머리에 씌워 ‘소금을 얻으러' 보냈다. 소금이 목적이 아니라 오줌 싸는 버릇을 고치려는 어른들의 암묵적 공조였다. 이웃집 문 앞에서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엄마가 소금 얻어 오래요” 하면 부지깽이를 들고 나와 키에 탁! 탁! 매질을 한 다음 싸르륵 싸르륵~ 소금을 뿌렸다.

 

키는 콩ㆍ팥ㆍ들깨 같은 곡식을 잔돌이나 티끌과 분리시키는 도구다. 보리를 절구에 찧은 다음 껍질을 날려 버릴 때도 키질을 했다. 키에 곡식을 한 바가지 놓고, 아래위로 까불면 가벼운 껍질이나 먼지는 날아가고, 잔돌과 쭉정이는 키 앞머리로 간다. 결국 필요한 알곡만 움푹 파인 뒤편으로 몰리게 된다.

 

키는 껍질을 벗긴 버드나무가지나 산죽을 엮어 만든다. 옛날 천시받던 고리백정들이 만들어 팔던 품목 중 하나기도 하다. 크기나 모양은 지방이나 만드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가운데가 움푹 파이고 날개가 달린 건 거의 비슷하다. 요즘도 시골길을 지나다 보면 키질하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하지만 머지않아 추억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게 틀림없는 풍경이다.


등잔 _ "기름 닳는다, 어서 불 끄고 자거라"

등잔만큼 오래 이 땅의 백성들과 친숙하게 지내 온 물건도 드물 것이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밤을 밝히는 거의 유일한 도구였다. 그 불빛 아래서 밥도 먹고 새끼도 꼬고 글도 읽었다. 등잔은 그 자체가 훌륭한 스승이었다. 아무리 심지를 돋워도 어느 정도 이상의 빛을 내주지 않고 그을음만 뿜어냈다. 과도함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진리를 그렇게 가르쳤다. 어쩌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그 정도의 빛이 적절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야 별도 제대로 반짝이고, 반딧불도 소중해지는 게 아닐지.

  

어머니들은 그 불빛 아래서 거침없이 바느질을 했다. 시아버지 두루마기도 시어머니 적삼도 아이들 옷도 만들었다. 바늘귀에 실이 잘 안 꿰어지고 땀이 고르지 못하면 눈이 어두워진 걸 한탄했지 불빛 탓을 하는 일은 없었다. 아이들도 그 등잔 아래서 숙제를 하고 연도 만들고 딱지도 접었다. 공책의 글자는 제법 반듯했고 연도 하늘을 훨훨 날았다.

아이들이 자지 않고 오래 놀고 있으면, 어른들은 성화였다 “기름 닳는다. 어서 불 끄고 자거라.” 등잔기름마저 귀한 시절이었다. 전기가 방방곡곡에 불을 밝히는 지금, 그 어디에서도 등잔불을 보기 어렵다. 적절한 어둠이 주던 안락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 필자

이호준 / 서울신문 뉴미디어국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