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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5. 12. 08:26

박근혜의 '기회주의 돞아보기' - 야당은 '반MB' 정서도 빼앗기고 있다.

기회주의자"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보통 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해 쓰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우리가 모두 대개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해야 마땅한 경우가 대단히 많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흔히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의미로 "기회주의자"라는 말을 쓰는 경우, 사실 진짜 과녁은 상대의 이기적인 탐욕이나 비겁한 생존본능과 같은 것일 때가 많다. 진짜 과녁을 직접 찌르지 못할 이유가 있을 때, "기회주의"라는 말이 엉뚱한 분풀이감 노릇을 해주는 것이다.

정치인이라는 사람이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바보일 뿐이다. 원칙이나 소신이라는 것도 언제나 때를 봐가면서 지켜야 하는 것이고, 하물며 맘속 깊은 곳에 간직한 원칙이나 소신을 아무 때나 상대를 가리지 않고 발설하는 것은 아주 단순한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대구 달성)이 이명박 정권에게 적극적인 지지도 표명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반대의견의 공표도 극도로 삼가 온 것은 지혜로운 행보였다고 할 수 있다. "기회주의"라는 단어의 표면에 폄훼하는 의미가 묻어있어서 사람들이 이를 기회주의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그런 통속적 의미를 떨어내버리고 말의 내용만을 살피면 말할 때와 안 할 때를 잘 가려내는 행동은 분명히 기회를 적절히 활용하는 셈이 된다.
▲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강연하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 의원 홈페이지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신문기자 대부분은 박 의원을 두고 "원칙정치" 따위 피상적이기 짝이 없는 문구를 지어내어 부르는 구태의연한 악습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 이상득 의원(한나라, 포항남구/울릉)을 두고 "상왕정치"라는 둥, 정동영 의원의 전주 덕진 출마를 "지역주의"라는 둥, 과거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는 "코드 인사"라는 둥, 누군가 술 마시다가 지어냈을 법한 얄팍하기 짝이 없는 싸구려 상투문구들은 한없이 목록을 이어갈 수 있다. 개그맨들이 지어내는 유행어는 무해한 재미라도 있지만, 정치판 언저리에서 만들어지는 상투어들은 재미도 별로 없으면서 해롭기가 그지 없다.

왜 해로운가? 박근혜 의원이 "원칙"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만 가지고 그의 정치스타일이 원칙을 중시하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분별력의 싹을 완전히 죽여버리기 때문이다. 박 의원이 한국 정치인 가운데 특별히 원칙을 지키지 않는 축이라는 말은 아니니 오해는 말기 바란다. 아마 그는 최소한 평균 정도는 되리라고 본다.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박 의원이 가끔 "원칙"을 내세우지만, 그가 항상 원칙만을 중요시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원칙을 지킬까 아니면 시의에 따라서 융통성을 보일까, 또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입장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얼마나 적극적으로 촉구해야 할지, 융통성을 보이기로 했다면 그 정도는 또한 어디까지로 해야 할지, 등등은 아무리 원칙주의자라고 하더라도 순간순간 실천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고심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될 질문들이다.

평소에 워낙 말을 아끼는 바람에, 박 의원은 그동안 두 마디 이상을 기자 앞에서 발설하면 "작심하고 하는 말"이라고 해석되어 왔다. 지금 미국 방문 중인 모양인데, 거기서는 상당히 여러 마디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려온다. 특히 두 가지가 주목할 만한데,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김무성 의원(부산 남구을)을 "합의추대"하는 데 반대한다는 말과, 대통령은 4년 중임으로 하고 대통령과 국회의 선거주기가 같아야 한다는 의견이다.

우선 첫 번째 건에 관해, 박 의원이 말한 내용은 당헌당규상 원내대표는 당내 선거로 뽑기로 되어있기 때문에 "합의추대"에 반대한다는 "원칙론"이다. 그런데 왜 김무성 의원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안 하려고 한다"고 말하고, 이를 받아 모든 신문들은 김무성 카드는 "무산"된 것으로 관측할까? 가령 김 의원이 경선에 출마하고 결과가 나오는 대로 원내대표를 맡든지 말든지 하는 것이 당헌당규에 가장 부합하는 원칙이 아닌가? 왜 "당헌당규를 어기면서까지 하는 데에 반대"라는 박 의원의 한 마디에 김 의원은 출마조차 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걸 "원칙주의"라고 바라보면, 시선이 비틀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이것은 원칙주의가 아니라, "원칙"이라는 단어를 기회에 따라 적절히 사용해서 자신의 입지를 유지 또는 강화하려는 전형적으로 정치적인 수사학인 것이다.

박 의원이 말하는 "원칙"이 기회주의적 수사임을 적발하는 까닭은 결코 그를 "기회주의자"라고 몰기 위함이 아니다. 위에서도 분명히 밝혔듯이 나는 정치인들은 모두 기회주의자여야 한다고 믿으며, 정치담론에서 "기회주의자"라는 단어는 폄훼의 의미는 없이 서술적인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누구든 기회를 탐색해서 활용하는 것은 전혀 잘못일 수가 없다. 정치인들이 기회를 "어떻게" 탐색해서 "무슨 목적으로" 활용하는지에 가치평가의 초점이 집중되어야, 정치담론이 현실정치의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박근혜 의원이 특유의 변죽 화법으로써 표현한 내용을 보면서 나는 2500년 전 헤로도투스가 적은 글귀 한 줄이 생각났다. 『역사』 제3권 §80, 오타네스가 일인지배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왕이란 가장 일관성을 결여한 인종이다. 그에게 절도를 갖춘 경의를 표해 보라. 그러면 자기 위엄 아래 굽실거리지 않는다고 화를 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굽실대 보라. 이번에는 아첨꾼이라고 경멸할 것이다."

박근혜는 이명박이 절도를 갖춘 경의를 받아들일 사람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절도를 갖춘 경의"라는 헤로도투스의 문구는 현대 한국어로 바꾸면 "사안별 협조"가 되는데, "계파정치는 없다"고 줄곧 강조하는 대통령에게 "사안별 협조"란 곧 반역과 같이 비칠 것이 뻔한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전면적으로 충성을 바칠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머지않아 토사구팽이 또한 뻔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권력의 생리를 잘 알고 있다는 데에 박근혜 내공의 핵심이 있다. 이것은 이명박 권력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권력에게도 해당한다. 다시 말해, 어떤 구체적인 이념이나 정책을 추구해서 대중을 끌고 가려들지 않는다. 대중에게 적대감을 혹시라도 불러일으켰다가는 단번에 노무현 꼴이 된다는 것을 그는 아마도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생래적으로 또는 학습된 본능을 통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 전두환 등이 보여준 예증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로서는 단지 부모를 비극적으로 잃은 공주의 애달픈 우아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민생을 걱정하는 듯한 이미지로써 방어적인 포지셔닝을 고수한다면, "선거의 여인"이라는 상품성을 지키면서 서서히 4년 후를 내다볼 수 있다. 이명박과는 굳이 더 친해질 까닭이 전혀 없다. 사이가 더 나빠지지만 않으면 별 문제는 없고, 나빠지더라도 상대에게 부당하게 핍박받는 모습을 보여주면, 공주가 순교자로 격상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진보"를 자칭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수구꼴통들로부터 "좌빨"이라고 분류되는 집합까지 범위를 넓혀도, 권력의 생리를 박근혜만큼 몸으로 체득한 이는 따로 생각나지 않는다. 정동영을 복당시키면 "지역당"이 되는지 마는지, 진보는 "성장"을 말하면 안 되는지, 자기들에게 지금 새삼스럽게 내다버릴 "노무현"이 남아있었는지, 자유주의가 어떻게 "진보"일 수 있는지 따위, 한 백년쯤 후에 역사적으로 어떤 판정을 받더라도 세상에 별 차이를 낳지는 못할 말꼬리 잡기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대중선거라고 하는 서바이벌 게임에서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예측이 나올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김무성 의원의 "합의추대"에 관한 논란에서 차기를 향한 박근혜의 행보는 더욱 힘을 받았다. 또다시 4·29 재보선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박근혜가 최대 지분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선거란 정책을 둘러싼 합리적인 선택 과정만이 아니라, 술수와 수사와 뒷거래와 포커 페이스 등등, 고래로 개발된 온갖 잡술과 협잡의 기예들이 총출동하는 종합적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사실은 일부 순진한 학생들이나 우물안 개구리들을 제외하면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다. 매표 행위나 사기, 또는 협박이나 폭력마저도 "걸리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동원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런 일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선거가 순전히 정치적 야심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서바이벌 게임에 불과하다면 민주주의는 모든 의의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의 덕목에는 정치판에서 생존하는 능력과 함께, 세상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구체적인 정책적 이념적 비전이 이원적으로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박근혜는 정책적 이념적 비전을 제시해야 할 책임을 면제받았다. 신문들이 "차기"를 거론하는 빈도가 앞으로 높아질수록 뭔가를 구체적으로 내놓아야 할 압박을 받게는 되겠지만, 우리사회의 공론장에서 세밀한 이치들은 대범한 바람몰이에 날아가기가 쉽다. 그러니까 차기 선거를 정책이나 의제 중심으로 끌고 가야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발견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책이나 의제를 개발하는 데에 더해서 그걸 가지고 바람까지 일으켜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촛불 시위에 반미의 의미는 없고 단지 정부의 졸속외교에 항의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박근혜 의원은 반MB 정서에 대해서도 상당한 (아마도 절반 이상의) 지분을 챙겨갈 계산인 것 같다. 그렇지만 정책과 의제는 여전히 그에게 아킬레스건이다.

왜냐하면, 신영철 대법관에 대해서 그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또는 방상훈 사장의 휘(諱)를 감히 거론했다는 괘씸죄가 국회의원의 면책특권보다 더 크다고 주장하는 OO일보의 행태를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경부대운하에 대해 불편한 심정은 알려졌지만, 4대강 정비사업에도 마찬가지로 마뜩찮은 것일까? 김대중·노무현의 "퍼주기"에도 반대했고, 지금 북한에 대해 무념무상으로 해탈한 이명박 정권의 속수무책도 싫다면, 대북관계에 대해 그가 가진 복안이란 무엇일까? 국가균형발전이라는 정책이 집값하락에 대한 특별시민들의 우려 때문에 좌초되는 상황, 학교라는 감옥에서 아이들에게 12년 동안 인질극을 훈련시킨 결과 국민의 절반 이상이 대학이라는 곳을 의사와 변호사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고시학원으로 간주하는 현실에 대한 견해는 무엇일까? 이마트에서 짜장면과 순대와 떡볶이까지 파는 무자비한 시장경쟁 때문에 어떤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는지, 거기에 대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로 무엇이 있다고 보는 것일까?

이런 문제들은 모두 이권과 관계된다. 그리고 이권은 언제나 편파적이라서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우아한 미소나 가냘픈 동정심이나 "자애로운 육여사"를 연상시켜서 대중권력을 상대하는 서바이벌 게임에서 어떤 성과를 보이든 말든, 저런 안건에 대해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곧 한편의 이익을 배제하고 다른 편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말이 된다. 용산에서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기는 아주 쉽지만, 재벌 건설회사의 요구와 보수정권의 취향을 미리 읽고 충성하느라 강경진압에 나선 경찰지휘부나 일선 특공대원들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과실치사 또는 최소한 직무수칙 위반으로 처벌하는 데 대통령으로서 찬성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다. 심심풀이와 미래예측을 겸해 벌써부터 차기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까마득한 격차로 부동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박근혜 의원께서는 이런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정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것일까?

공인일수록 겸손을 요구하는 것은 모든 사회가 마찬가지인데, 한국사회에서 겸손이란 공공적인 쟁점에 대해 과묵한 태도를 일컬을 때가 대단히 많다. 십여년 전에 어떤 장관직에서 물러난 인사는 "장관해봤더니 관료들에게 문제가 참 많더라"는 말을 관광 소감 전하듯이 토로했었다. 장관도 "주제를 알아야지", 멋모르고 설쳐대다가는 오래 못 간다. 과연 그 장관은 관광객의 주제에 만족해선지, 이 년이 넘게 자리를 보전해서 해당 부서에서 "장수"한 축에 들었었다. 이런 방식으로 이해되는 "겸손"이란 상대가 나를 직접 공격해 오지 않는 한, 무슨 일이 있어도 주변 사람들과 원만하게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처세술을 뜻한다.

하지만 나는 정치학자로서, 저런 식의 처세술에만 달통한 사람들이 공직을 차지하는 사회는 건강할 수 없다고 본다. 만약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는 사항들이 바로바로 국회의 의제로 반영이 되고, 국회에서 논의가 된다면 적어도 국회의원으로 네 번째 임기를 수행하고 있는 박근혜 의원이 저런 의제들에 관해 침묵을 지킴으로써 겸손의 이미지를 자아내는 무책임한 처세술로 일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국회의원들 중에 이 나라의 법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제는 슬슬 신영철 대법관에 대해 뭔가 위임받은 주권을 행사해봐야 하지 않을까?

아무리 봐도 이용훈 대법원장은 신대법관이 자진사퇴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여론이 냄비처럼 식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라고 여기는 것 같다. 윤리위원회라는 곳에서도 문제는 있지만 징계할 정도는 아니라고 봤는데, 이런 사정에서 신대법관이 <한겨레> 사설의 체면을 높여줄 특별한 개인적인 이유라도 가지지 않는 한, 느닷없이 자진사퇴할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까 법관의 독립을 규정하고 있는 헌법을 수호할 책무는 이제야말로 국회의 몫이 아닌가?

잠시 의석 분포를 살펴보니 신영철 대법관 탄핵소추발의에도 희미한 가능성은 있어 보인다. 민주당 84, 민주노동당 5, 창조한국당 3, 진보신당 1을 합하면 93석이고, 무소속 가운데 정수성 의원과 최연희 의원을 빼고 나머지만 합세해도 100명을 채울 수 있다. 친박연대나 선진당 또는 한나라당에서 개별적으로 합세할 의원이 있다면 더욱 쉬워질 것이다. 더군다나 탄핵안 발의를 시도하다가 혹시 기어이 100명을 채울 수 없다면 그런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유권자들에게는 정보가 되는 것이다. 아울러 설사 탄핵 발의가 도저히 안 돼도, 아무리 소수당이라도 결의안은 언제든 발의할 수가 있다. 예컨대 "신영철 대법관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발의할 수도 있고, 또는 법원장의 행정업무를 명확하게 제한하면서 동시에 재판개입에 대한 처벌규정을 명시하는 법률안을 발의할 수도 있다.

얼핏 보면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교과서 수준의 정치의식으로 서바이벌 게임에 대단히 취약한 사람들과 처세만 잘할 뿐 생각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 두 부류가 패거리 정치라는 차원에서 서로 겹치고 만다. 자체적으로 생존능력이 없기 때문에 당이라는 조직에 기대려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정책이라는 염불은 멀리하고 줄서기라는 잿밥에만 눈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선거의 여인"이라면 일단 국회의원으로서 자생력은 확보한 셈이다. 더구나 박근혜는 이명박에게 줄서기는커녕 줄곧 자주성을 과시해왔다. 이 정도의 기반을 갖췄다면 국회의 논의나 표결에서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법하건만, 당론에 어긋난 투표를 "항명"으로 간주해서 모질게 다스렸던 군부독재자의 따님이니, 집시법이나 미디어법의 개악 강행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그처럼 적극적인 목소리를 낸다면 어떻게 될까? 진보쪽에서는 환영할 사람도 있겠지만 걱정할 사람도 꽤나 많지 않을까?
▲ ⓒ청와대

작년 미국 선거에서는 부시가 워낙 인기가 없어서, 공화당의 매케인조차도 부시 반대를 표방해야 했다. 물론 그처럼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전략이 통할 수는 없었지만, 만약 박근혜가 일정 시점에서 현재의 방어모드를 버리고 반MB 노선을 노골화한다면 상황은 전혀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박근혜 의원이 지금부터 좀더 분명하게 현재 한국사회의 주요 쟁점에 관해 자신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바란다. 노무현이 개헌을 말한 지 2년이 지난 후에 대답하는 방식은 기회주의 중에서도 아쉬울 게 별로 없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이다. 대통령이라면 노무현이나 이명박보다는 느긋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아마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일이 참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러기를 바란다고 박근혜 의원이 그렇게 행동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013년 선거판이 시작된 다음에나 참모들이 작문해준 모범답안을 가지고 비로소 약간의 발언을 꼭 선거용으로 필요한 만큼만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도전해야 할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전에 그로 하여금 숨지만은 못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위에 열거한 몇 가지 말고도 지금 이 나라 야당들이 공론장에서 안건으로 상정해야 할 의제가 내가 보기에는 무궁무진하구나. 그걸 다 방치한 채로 한나라당의 "내홍"만을 즐기다가는, 결국 박근혜 의원이 이명박 대통령을 상대로 벌이는 서바이벌 게임을 무료로 관람하는 사이에 귀중한 시간을 다 허비하는 비용을 치를 것이다.

박동천 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