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펠러'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8.01 위기를 극복한 기업가 2
2008. 8. 1. 08:19

위기를 극복한 기업가 2

[위기를 극복한 기업가] 비난 딛고 미국의 상징으로 우뚝 선 록펠러의 힘

미국의 석유왕이자 최고의 부자였던 존 데이비슨 록펠러. 하지만 그는 생존해 있는 동안 끊임없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석유산업을 평정하는 동안 편법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록펠러는 대중의 질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을 뿐만 아니라 자선사업가로 변신함으로써 오늘날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록펠러는 그의 잘못을 통해서, 또 그의 선행을 통해서 우리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 주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 


록펠러, 악덕기업가와 자선사업가의 사이

록펠러의 전기를 읽다 보면, 한 사회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어떤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가를 똑똑히 배울 수 있다. 록펠러는 부를 이뤄 가는 과정 내내, 그를 향해 덤비는 언론ㆍ대중과 맞서야 했다.

1839년에 태어나서 1937년에 사망한 존 데이비슨 록펠러(록펠러 1세)는, 앤드류 카네기와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가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늘 '악덕기업가'란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온갖 편법을 통해 사업을 확장하고 부를 축적한 까닭에, 그의 돈은 '더러운 돈'이라는 사회적 인식도 강했다.

그렇게 악덕 기업가였던 그가 오늘날 존경받는 부자로 기억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가로 꼽히는 존 데이비슨 록펠러. 그는 미국의 석유를 독점하며 한때 악덕기업가란 악명을 얻기도 했지만, 그가 가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오늘날에는 위대한 자선사업가로 칭송받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남북전쟁과 오일러시를 거치며 석유왕이 되다

록펠러가 활동하던 시기는 미국에서 막대한 부와 산업이 만들어지던 때로,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도금시대> (1873년)에서 ‘부자들이 거들먹거리는 시대'라고 묘사하기도 하였다. 같은 시대에 활동하던 부자들은 밴더빌트, 굴드, 피스크를 들 수 있다.

1861년 4월에 시작된 남북전쟁은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에게 사상 최악의 날벼락이었지만, 그런 혼란의 시기에도 한몫을 톡톡히 챙기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횡재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록펠러 역시 동업자와 함께 세운 클라크 앤드 록펠러 사에 군수물자 주문이 쇄도하면서 더 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종자돈을 모으는 데 성공을 거둔다.

록펠러가 성공을 거둘 무렵 미국은 곳곳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석유산업이 붐을 이룬다. 석유에서 ‘미래'를 발견한 록펠러는 정유소 운영 등의 경험을 거쳐 1863년에는 동업자 클라크ㆍ앤드류스와 함께 정유공장을 운영하게 된다. 이 공장은 클리블랜드 최대의 정유공장으로, 2위 업체의 2배인 하루 500배럴의 정유능력을 갖고 있었다.

 확장시대에 편승하여 록펠러는 자신이 가진 모든 돈과 에너지를 퍼부어 사업을 키우게 된다. 바로 이 회사가 훗날 미국의 석유생산으로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스탠더드오일 사의 원조가 된다.

석유산업이 발전하는 데는 미국 철도의 힘이 컸다. 록펠러는 철도회사에 뇌물 증여 등을 통해 경쟁사의 석유 운송을 방해하기도 했다. 이런 편법 때문에 록펠러는 대중과 언론으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았다. 

1878년 미국 전체의 정유능력이 연간 360만 배럴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록펠러 소유의 스탠더드오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330만 배럴이나 되었다. 그는 1880년에는 다른 회사를 합병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경쟁사들을 물리치고 미국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90∼95%를 손에 쥐게 되었는데, 역사상 이처럼 절대적인 독점권을 확보한 기업가는 전무했다. 석유의 생산ㆍ정유ㆍ판매를 담당하던 스탠더드오일 및 계열사들은 1882년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란 이름으로 통합된다.


대중의 따가운 비난과 지탄에 직면하다

록펠러에게 위기는 사업상의 위기보다는, 스탠더드오일 사가 성장하면 할수록 커지는 대중과 언론의 반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점에 있었다. 1888년이 되면서 스탠더드오일트러스트는 모두 40개의 기업을 산하에 거느리게 되는데, 이 가운데 14개 기업이 완전 독점 상태에 있었다.

문어발식으로 확장을 거듭하는 스탠더드오일 사를 두고 뉴욕주 상원위원회는 “이 나라의 상거래시스템에 번져 가고 있는 질병”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물론 록펠러가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이 아주 신사적이지만은 않았다. 경쟁사들을 압박해서 하나하나 무너뜨리는 것에 대해 혹자는 비열한 방법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돈을 버는 과정이 결코 천사와 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1890년대가 되면 스탠더드오일은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 최강의 기업이자, 뻗어 가는 미국의 힘을 상징하는 기업이 된다. 하지만 록펠러는 사업가로서 격렬한 지탄과 오명의 주인공이 된다. 록펠러는 사업 초기부터 여론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서 거액에 해당하는 수천만 달러를 들여서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노력하면 할수록 여론과 언론은 더욱 나쁜 쪽으로 록펠러와 스탠더드오일 사를 받아들이게 된다.

당시 록펠러를 향한 여론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는 사례는, 그의 교회 헌금 이야기가 적격이다. 1905년 초 보스턴에 모인 교회 목사들은 해외선교회에 기부된 10만 달러를 자연스러운 찬송과 감사 기도로 기꺼이 받  아들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헌금이 록펠러의 지갑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지자 노기에 찬 웅성거림이 예배당을 가득 채우고, 급기야 한 목사가 장로들에게 ‘더러운 돈'을 당장 돌려보내라고 요구하기까지 한다. 목사가 이 정도의 분노를 표현할 정도였으니, 시중의 록펠러에 대한 여론은 '칼 든 강도' 정도였을 것이다.

록펠러의 돈은 '더러운 돈'으로 인식되어 교회 목사들이 록펠러의 헌금조차 거부할 정도였다.

위기 극복법 1 _ 폭풍우에 맞서기보다 돌부처의 평정심을 유지하다

어떤 사회든지 간에 부에 대한 관점이 제대로 정립되기까지 대중, 언론, 정치 그리고 기업가들 사이에 극적인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 사회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반전시킬 것인가는, 결국 기업가 자신의 판단과 믿음에 달려 있다.

록펠러는 사회의 거센 비판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그는 대중의 질투와 시기심을, 시대를 앞선 사람들이 당연히 지불해야 하는 비용 정도로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때로는 지나치게 냉정하게 보이는 그의 대처방식은, 싸움을 걸어오는 수많은 사람들과 기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기업인들보다 장수할 수 있도록 도와준 힘이었다. 한 친구가 그에게 스탠더드오일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공격을 언급하자 록펠러는 "내가 그걸 문제 삼으면 주의를 환기하게 될 거고, 무시해 버리면 곧 사라질 걸세"라고 답하였다.

하지만 록펠러를 향한 언론의 공격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청문회에 서야 했다. 록펠러는 이때도 자신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실어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로 일관했다.

하지만 그것은 록펠러의 전략이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상황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보다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가 말을 아낀 것은 훗날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기 극복법 2 _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

여론의 폭풍우가 조금씩 멈출 무렵, 록펠러는 보통의 기업가들과 달리 자선사업에 힘을 쏟는다. 자신의 가문과 기업에 쏟아진 대중과 언론의 질투ㆍ시기심을 장기적으로 희석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결국 이 방법은 록펠러의 의도대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게 된다. 다시 말해 그와 가문에 대한 오명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록펠러가, 그와 같은 시대에 각종 편법으로 미국 최대의 철도 재벌로 발돋움한 밴드빌트(1794~1877)와 다른 점은, 사치에 돈을 쏟아 붓지 않고,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과 증오를 자손들에게 더 이상 물려주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는 데 있다. 그를 통해 독점기업가의 위치에서 역사에 남는 자선사업가로 새롭게 자리매김했을 뿐만 아니라, 고통받는 인류를 돕는 선인으로 자신을 바꾸었다.

1910년 뉴욕의 <아메리칸> 지는 지난 20년 동안 기부금 총액을 “앤드류 카네기 1억 7,930만 달러, 존 록펠러 1억 3,427만 1,000달러”로 비교해서 보여 주었다. 카네기의 자선에는 언제나 자기 과시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록펠러의 자선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그는 오랜 기간에 걸쳐 침례교회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하였고, 시카고대학의 재건과 관리에도 큰 힘을 보탰다. 1910년까지 그가 시카고대학에 기부한 돈은 4,500만 달러에 달할 정도로 거액이었다.

록펠러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더러운 돈'이라는 오명이 붙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고통받는 인류를 위해 아낌없이 썼다는 데 있다.
록펠러센터가 있는 뉴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한번 록펠러를 기억하는 이유이다.

 록펠러는 100살 가까이 장수한 덕분에 자신에게 쏟아지던 비판이 서서히 존경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 자신이 좋아하는 말 ‘모든 재난을 기회로 바꿔라'를 몸소 실천에 옮긴 덕분이었다. 록펠러재단, 록펠러센터, 록펠러의학연구소 등만 봐도 그것이 너무나 잘 드러나지 않는가.


- 공병호 /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