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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8. 14. 09:12

다시 보는 동양고전 이야기

삼국지, 21세기형 문화 콘텐츠로 진화를 거듭하다

영화로 게임으로, 소설로 또 경제경영서로 무한한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삼국지. 이렇게 삼국지가 다양한 변신을 거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삼국지가 동아시아 최고(最高·最古)의 스테디셀러라는 데에 있다. 또 하나는 삼국지는 살아 있는 생명체, 즉 불멸의 문화 콘텐츠로 ‘돈' 즉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콘텐츠로 변화하는 삼국지

서양의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성경>이라면 동양은 단연 <삼국지>이다. 소설 삼국지가 조선에 들어온 것은 조선 선조 2년(1569)때였다. 당시 기대승(조선 선조 때의 성리학자, 1527~1572)은 삼국지를 아예 ‘무뢰배가 잡소리를 모아 옛날 이야기처럼 꾸민 것'에 불과하다고 폄하했다. 그러나 이것은 경서(經書:옛 성현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를 중시하는 유학자가 바라본 시각일 뿐이다.

세월이 흘러 소설 삼국지는 서울 한복판에 관우사당, 유비사당을 짓게 하고, 판소리 <적벽가>를 비롯해 박종화, 박태원, 김구용, 이문열, 황석영, 김홍신 등 많은 작가들이 앞다투어 책을 내게 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천만 부 이상이 팔린 책도 삼국지뿐이다.

특히 소설가 장정일의 <장정일 삼국지>는 나관중의 ‘한족, 가부장적 남성, 유교, 촉한 중심주의'를 산산이 부숴 버리는 초월적 상상력을 선보였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칠허삼실(七虛三實)'일 뿐이라는 청나라 사학자 장학성의 말처럼, 어차피 소설은 가상의 이야기이므로 작가의 상상력으로 얼마든지 재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문화 콘텐츠에서도 삼국지의 변신은 변화무쌍하다. 영화 <용의 부활>은 ‘삼국지 외전(外傳)' 형식으로, 원래 공손찬의 부하였다가 장군 신분으로 유비를 주군으로 모시고 자연사한 조자룡을 졸개에서 입지전적 장군으로 출세시키고, ‘있지도 않은' 조조의 손녀와 결사항쟁하다 죽는 것으로 끝난다.

한국, 중국, 일본이 함께 제작에 참여한 영화 <적벽대전>은 주유(중국 삼국의 하나인 오나라의 유명한 신하)를 위한, 주유에 의한, 주유의 영화다. 소설에서 주유는 모차르트를 질투한 살리에르처럼 라이벌 관계인 제갈공명을 투기하다 분에 못 이겨 급사하지만 영화에서 그들은 ‘붕우(朋友)' 즉 친구이다.

만화에서는 삼국지 비틀기가 더욱 자유롭다. 고우영의 <삼국지> 내용은 원작 소설을 따르지만 인물 해석은 ‘탈(脫) 나관중'이다. 유비는 겁이 많고 치사하다. 무결점의 영웅이던 제갈공명과 관우는 권력 투쟁을 하는 라이벌이다.

 

최근에는 중국도 <적벽온라인> 등 자체 개발 게임들을 선보였지만, 삼국지 게임은 중국보다 한국이 앞서고 있다. 최근 위메이드의 <창천(蒼天)>은 대만과 중국에 수출 계약을 맺고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일본 역시 삼국지에 대한 인기는 식을 줄 모른다. 일본 코에이가 만든 전략시뮬레이션 <삼국지>는 게이머들이 원하는 나라와 인물로 드림팀을 구성해 천하통일을 할 수 있다.  또한 성인용 게임 <연희무쌍>이 캐릭터를 미소녀로 바꿔 천하의 패자를 겨누게 한다. 2000년에 상연한 ‘슈퍼 가부키 신삼국지'에서 여자 유비가 관우의 애인으로 나와 세간을 놀라게 했다. 일본다운 상상력이다.

삼국지의 본적인 중국은 삼국지를 이미 관광산업에 접목시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1993년 CCTV의 84부작 드라마 ‘삼국연의' 촬영장을 3년여 공사 끝에 완공한, 저장성(江蘇省) 우시(無錫)의 드라마 세트장이 바로 그곳이다.

 


상상력으로 재해석되고 있는 살아 있는 생명체

이렇게 삼국지가 다양한 변신을 거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은 삼국지가 우리에게 ‘익숙한, 너무나 익숙한' 동아시아 최고(最高·最古)의 스테디셀러라는 데에 있다. 익숙한 것을 비틀어서 낯설게 하는 미학적 효과, 즉 친숙함과 신선함, 통쾌함과 재미가 골고루 섞여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누구나 접했던 삼국지는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있는 향수를 자극하기도 한다. 삼국지는 정치, 경영 등의 거대담론뿐만 아니라 생활 속 소소한 처세의 지혜를 깨닫게 하고, 인생의 묘미를 느끼게 하는 데에도 그 생명력이 있다. 삼국지는 읽는 독자가 1억 명이면 1억 편의 삼국지가 생기는 격이다.

일찍이 <중국의 과학과 기술의 문명사>를 쓴 조셉 니덤은 <삼국지>를 ‘경제전쟁사'로 쓰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삼국지>는 다양하게 변신을 거듭하면서 진화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말이다. 우선 삼국지는 군사학의 모범적 본보기이다.

중국사에서 전무후무한 농민출신 황제인 명태조 주원장은 글을 읽을 줄 몰라 선비 참모들에게 ‘이것'을 들려 달라고 졸랐다. 흩어진 여진부락을 통일하면서 백전백승을 하던 청 태조 누르하치가 전장에서 끼고 살던 것도 바로 이것 <삼국지연의>였다.

최근에는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이 MBA 교과에 ‘삼국지 경영학'을 넣었고, 일본과 중화권에는 삼국지 처세학, 경영학, 리더십, 참모학, 정치학, 사상학, 인간학 등 관련 책이 부지기수다. 삼국지를 다른 분야에 ‘통합학문'적으로 응용해 실용화하는 것이 동아시아의 공통적인 현상인 셈이다. 물건을 넣어 두면 새끼를 쳐서 끝없이 나온다는 화수분 그릇처럼 말이다.

지난 해 발행된 최우석의 <삼국지 경영학>은 한국의 기업 풍토? 문화와 ‘삼국지 경영 마인드'를 접목시킨 점이 주목할 만한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가령 조조가 천하 패업을 이루게 한 결정적 싸움인 관도대전의 승리를 예로 들며, 기업 경영에서도 오너의 승부수가 기업의 운명을 가른다고 한다. 이땐 결코 계산만으로는 안 되고 승패는 하늘에 맡기고 전력투구하는 수밖에 없다.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에서 나오지만 큰 부자는 하늘에서 내린다는 것이다.

또한 1인자가 능력이 있는 2인자를 숙청하는 게 아니라, 유방이 행정의 달인 소하에게,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에게 그랬듯 유비가 능력이 있는 공명에게 과감히 힘을 실어 준 이상적 공동 경영에서도 오너의 경영 마인드를 읽어 낼 수가 있다. 소니의 위대한 발명가 이부카 마사루 옆에는 판매왕인 모리타 아키오, 혼다에는 천재 기술가 혼다 소이치로와 관리의 달인 후지사와 다케오, MS사에는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 신화를 쓸 수가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에는 문화 콘텐츠, 즉 ‘소프트 파워(Soft Power)'가 각국 경제를 이끌어 갈 핵심 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때문에 고전의 현대적 재해석을 바탕으로 한 문화 콘텐츠 재창작 산업이 각광받고 있다. 삼국지의 변신은 ‘부(富)=부가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늘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삼국지연의>는 정사가 아니라 ‘소설'이기 때문에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변신을 거듭해도 무죄다. 패러디이든 비틀기이든, 재해석이든 상관없다. 시대의 가치와 감각을 수용하면서 독자들에게 ‘그 무엇인가를 새롭게' 제공해 주면 된다. 한 번 태어나면 절대로 죽지 않는 고전의 힘인 것이다.


- 노만수 / 서울디지털대학 문예창작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