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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8. 3. 23:06

추억하고 싶은 것들 2

추억하고 싶은 것들 - 골목길의 일곱 가지 풍경

우리 곁을 스쳐 가는 시간을 따라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한때는 우리들의 일상이었으나 이제는 빛 바랜 추억이 되어 버린 그 시절의 첫 페이지에 떠오르는 건 단연 골목길이다. 좁은 골목길은 그 당시 아이들에겐 세계의 전부였고, 해지는 줄도 모르고 뛰놀던 최고의 놀이공원이었다. 가난했지만 정겨웠던 그 옛날의 골목길, 그 길에 서면 잊고 지낸 지난 날의 꿈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 올망졸망 ]

산 없애고 개천 메워서 수십 층 아파트만 세우는 요즘 ‘올망졸망'이란 단어는 잊은 지 참 오래다. 더욱이 이것을 집이 모여 있는 풍경에 쓰는 경우는 이제 ‘전설 따라 삼천리'에나 나올 법한 일이 되어 버렸다. 방 몇 개 크기의 아담한 집들이 사이좋게 어깨를 맞대며 작은 마을 하나를 만든다.

 

이런 장면은 언덕배기에 제일 잘 어울린다. 구릉이 많은 한국 지형에 순응하며 만들어 낸 조형성이다. 막 모인 것 같지만 나름 질서가 있다. 낮은 집이 앞에 스크럼을 짜고 그 뒤로 키가 조금 더 큰 집들이 도열한다. 햇빛을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나눠 갖는다. 보기에도 좋다. 축구선수들이 사진을 찍을 때도 이 대형이다. 앞줄은 뒷줄이 든든하고 뒷줄은 앞줄이 살갑다. 3층짜리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지만 밉지 않다.


[ 추억 ]

 


골목길과 동의어는 단연 ‘추억'이다. 그만큼 급하게 사라져 가기 때문일 것이다. 골목길에서 ‘추억'을 만들어 내는 대상은 여러 가지인데 이발소도 빼놓을 수 없다. ‘미일 이발관'이란다. 벽에 걸어 말리는 수건과 빙글빙글 돌아가는 ‘적-청-백'의 나선형 띠가 이발소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집은 흰 매스만으로 구성되어 검소하다. 문도 싸구려지만 시원시원하게 써서 벽과 대조를 이루며 구성분할미를 보여 준다. ‘미일 이발관'이라는 글씨는 주인 아저씨가 직접 쓴 것이거나 아들놈 솜씨,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욕심 안 부리고 모든 것이 옛날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이발소는 ‘소품'이 아니라 ‘장소'이기 때문에 추억에 오래 남는다. 어릴 적 동네 이발소에서 이발하면서 그 시간이 지루해 꾸벅꾸벅 졸다 이발사 아저씨한테 혼난 기억을 나이 좀 먹은 남자들은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다. 스토리가 있고 사람이 같이 하고 그래서 추억이 생겨나는 곳이 바로 ‘장소'이다.

 

[ 갈림길 ] 

골목길의 공간적 특징을 들라면 ‘미로'이다. 미로는 풀라고 있는 것, 사람 사는 골목길이니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나름 규칙이 있는데 갈림길이 그 비밀이다. 갈림길은 미로를 만들지만 미로에 규칙성도 준다.
골목길 속에는 사거리, 오거리, 심지어 칠거리까지 다양한 갈림길이 있다. 수직으로 어긋나는 갈림길도 또 다른 매력이다. 오징어 다리 찢듯 나란히 오다가 ‘Y'자형으로 갈라지는데 높이 차이가 난다. 한쪽은 윗길, 다른 쪽은 아랫길로 갈린다. 아랫길은 대문으로 막히지만 지붕으로 옮겨가 계속된다. 지그재그 모양의 지붕이 길의 궤적을 암시한다. 윗길은 그 지그재그 모양을 그대로 타고 꼬불꼬불 이어진다. 갈림길에 꼬불꼬불한 길이 더해졌으니 골목길의 정수를 획득했다.


[ 놀이 ]

형이 동생을 데리고 즐거운 놀이 중이다. 앞에 있는 녀석이 형 명진이고 뒤 녀석이 동생 명성이다. 동생은 형 말을 잘 듣는다. 둘이 술래잡기를 하는 모양인데 "너는 괴물 해 나는 파일럿 할게"라는 형 말에 신나서 "응!" 한다. 형이 동생을 아끼는 마음도 유별나다. 연신 머리를 쓰다듬는다. 둘은 쫓고 쫓기고 난리를 치며 신나게 논다. 저 나이면 학원에 붙들려 가 있을 시간인데 용케 뛰어놀고 있다. 계단이 놀이터다.
삐뚤삐뚤 난 계단을 뛰어다니면서 이 녀석들은 비정형의 미학을 기억 속에 쌓는다. 요즘 세상에 하기 힘든 좋은 경험이다. 학원에서 억지 춘향으로 암기하는 영어단어와는 비교가 안 되는 소중한 교육이다. 이렇게 뛰어노는 것은 어린아이들만의 당연한 권리인데 이것이 별난 현상이 되어 버린 세상이다. 골목길 속에 가면, 운 좋은 날 아주 가끔 신나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기분 좋은 깔깔거림을 만날 수 있다.
 

[ 휴먼 스케일 ] 

요즘 집 밖에 나서서 내 몸에 견줄 만한 스케일을 만나기란 정말 힘들다. 사람 사는 집이 70층을 넘어서고 구청 수준에서 세계 최고층 건물을 짓겠다고 난리인 세상이다.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신문을 펼치 면 상가 광고라고 그린 그림에 사람은 끝없이 넓은 매장에 바글거리는 개미떼로 그려진다. ‘사람 머릿수=돈' 이외의 가치는 없다.
이런 세상에서 골목길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 주는 유일한 곳이다. 휴먼 스케일을 통해서이다. 집은 내 몸집과 비등하다. 어깨동무를 할 수 있을 정도다. 꾸미지 않아서 더 그렇다. 길 폭도 두세 걸음, 발걸음 수로 환산된다. 팔짝 뛰면 닿을 폭이다. 폭이 이렇고 높이도 이러니 골목길은 어머니 자궁처럼 포근하다. 따뜻하게 맞아 주고 위압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는다. 사람이 지은 집에 사람이 무시당하는 꼴을 안 당하는 것만으로도 축복인 세상이다. 그 축복은 고스란히 골목길 속에 남아 있다. 휴먼 스케일 덕이다.
 

[  ] 

바로 그 ‘파란대문'이다. 골목길 속의 청량제이다. 무채색이 많은 골목길에 악센트를 주고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색 요소이다. 주변에서 궁금해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새마을 운동 끝에 새로 이은 시골 슬레이트 지붕 가운데 유독 ‘파아란~' 색이 많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답은 ‘청량'과 하늘을 닮고 싶은 ‘코발트블루', 두 가지이다. 이 답은 이를테면 골목길 속 ‘파란대문'의 탄생의 비밀쯤 된다.
‘파란대문'은 복잡한 골목길 속에서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눈에 띄는 색이라서 길 안내 할 때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한다. ‘파란대문'만 찾으면 골목 속 길 찾기에서 일단 칠부능선은 넘은 셈이다. 막다른 골목에서는 대장노릇도 한다. 색으로 주변을 제압한다. 짧은 골목 마디 하나를 파랗게 물들인다. 맑은 날 햇빛 받으면 파란색은 맑게 빛난다. 흐린 날에는 온통 회색인 주변에 삶의 생기를 준다.  


- 필자

임석재 /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