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8. 1. 13:53

성석제 쏘가리 2008.08.01 ~ 2008.08.14

재미있는 글이다. 작가 참 재미있다. 완본이 아닌 듯 하다. 찾아 봐야 겠다.
냉소와 해학 그리고 감성이 있다.

아래는 그 중 몇개의 글이다.

1.'나 돈 없어서 이 짓 하는 거 아냐' 족    
2.개천에서 늙은 용을 만났노라
3.저수지의 지킴이들
4.내가 사랑한 반말족
5.삼생(三生)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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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나 돈 없어서 이 짓 하는 거 아냐'


우리 나라에는 전세계적으로도 드문
족속이 드물지 않게 있다. 그 족속의 이름은 '나 돈 없어서 이 짓 하는 거
아냐' 족이다.

이들은 집단으로 거주하지 않고 사회
곳곳에 박혀 맹활약을 하고 있어 보통 사람이 그들을 만나는 데 큰 어려
움이 없다. 다만 그들이 이마에 자신이
속한 족속의 이름을 붙이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보통 사람과 구별하는
데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약간이다.
아주 약간. 내가 만났던 그 족속 가운데 한 사람에 대해 소개를 해
볼까 한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돈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약 사오십 세쯤 된 아주머니였다. 그 톨게이트는 구간에
따라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정액제로
팔백 원인가를 징수하는 곳이었는데 내게는 잔돈이 없었다. 나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 요금 징수원에게
주었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동작이나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돈을 옮기고 차창을 연 다음 돈을 꺼내는
데는, 전문가가 아닌 한- 이런 일에도 전문가가 있는가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터인데 우리 나라의 고속도로
톨게이트에는 남보다 먼저 요금을 내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사람
들이 미친 듯한 속도로 매일 매시 달려들고
있으니 전문가가 없으란 법도 없다- 시간이 좀 든다. 그 요금 징
수원은 그 시간이 아까웠거나 지겨웠던
모양이다. 돈을 받더니 내게 도로 건넬 듯 하면서 "잔돈 없어요?"
하고 말했다. 나는 "없는데요"하고 나중에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동작에도 보통 이상의 시간이 들어갔다.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말을 좀 느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 요금징수원은 "왜 잔돈을 안 갖고 다녀요?" 하고
묻는건지, 비난하는 건지, 지도하는
건지 모를 말을 했다. 여전히 만 원 짜리를 손에 든 채로.

그 만 원 짜리를 쳐다보는 순간, 내게서
두려운 마음이 가시고 , 그건 내 거니까, 약간의 짜증이 치밀었다.

그래서 나는 "빨리 바꿔 주세요. 뒤차가
기다리잖아요." 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 요금징수원은 무슨 위대

한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뒤차 걱정하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느려요. 그리고 뒤에 차 없어요" 하고 잔돈
을 세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느릿하게 잔돈을 계산하는
사이에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아주머니가 나를 가지고 놀고 싶어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게 빠른 동작을 배워서
훌륭한 사회 역군이 되라고 충고를 한 것인가. 아니면 심심해서
농담을 하자는 것인가. 또 아니면.....
생각을 해 보니 어느 경우도 해당이 되지 않았다. 그는 '나 돈 없어서
이 짓 하는 거 아냐'족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생각을 하는데도 시간이 좀 든다. 그래서 나는 그 위대한 족속
의 일원에게 그들의 정체에 대해 따지고
들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저 꿀먹은 벙어리처럼 잔돈을 받고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그 자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날 나는 곳곳에서 '나 돈 없어서 이
짓 하는 거 아냐' 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고층 건물 주차장 관리를 하는
수위. 제법 이름난 설렁탕집 주인. 동사무소
직원.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서비스
할 생각이 없는 커피전문점 종업원.
그날 그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일제히 봉기라도 한 것일까.

내가 일진이 사나웠던가. 아니면 오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예민해져 있어서였을까.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남산의 톨게이트를
지나게 되었다. 오전의 교훈을 떠올린 나는 톨게이트가 나타나자마자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갑 안에 천
원 짜리 지폐가 한 장 밖에 없어서 주머니마다 손을 집어넣다가 그만
돈을 내기 위해 정차해 있던 앞차를
들이받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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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천에서 늙은 용을 만났노라


학교 졸업하고 처음으로
그를 만났으니, 그동안 얼추 15년은 흐른 것 같다. 고시촌 포장마차 안에서였다.

그는 여전히 고시 공부를 하고 있을
테고 술을 마셨다 하면 새벽에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말아먹는 것을 마지
막 순서로 삼곤 했으니 그 장소, 그
시각 아니면 어디서 그를 만나겠는가. 그날도 그는 청운의 꿈을 품은
이무기들이 득시글거리는 고시촌을 싸고
흐르는 개천, 새숲내를 바라보며 혼자 앉아서 국수를 먹고 있었다.

그가 나이 사십을 바라보는 오늘까지
여전히 고시공부를 하고 있을 거라는 방정맞은 생각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는 전형적인 공부벌레였다. 시험이
다가오면 과거 수십년간 기출문제를 달달 외우는 것은 물론이고 시험지를
얻어다가 철저한 도상 연습까지 했다.
그러나 외우거나 연습을 안한 데서 문제가 나오면 그는 한 줄도 쓰지 못했
다. 그 융통성 없는 성질이며 결벽증을
버리지 못했다면 마흔이 다 되도록 고시에 붙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20년 전 나란히 성적표를 받아들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다. 네가 다방하고 생맥주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내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시간보다
월등히 많은데 어째서 성적은 똑같이 나오냐." 그는 그것도 공부거리
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에게
충고해 주었다. "이보게, 친구. 세상에는 공부해서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네. 학교 시험도 세상의
일부인데 공부만 한다고 되겠는가. 하긴 자넨 결혼 도 공부를 한 다음에 할
사람이지. 오늘 예습할 기회를 만들어줄 테니
같이 고고장이나 가자구." "부탁인데, 내 몫까지 살아줘." 그게 그의 대답
이었다. 15년 만에 만났지만 나는 그의
부탁대로 그의 몫까지 신나게 춤추며 살아주지 못한 것 같아 못내 미안했다.

"해마다 고시 최종합격자 명단에서
자네 이름을 찾다가 눈까지 버렸네. 요새 정원이 훨씬 늘었다면서? 돋보기라도
써야겠어." 그는 내가 내미는 술잔을
받아 마시면서 쓰게 웃었다. "맞아. 이게 감옥이지. 한 번에 상류사회로 진출
하겠다는 야심 때문에 제발로 들어가
앉는 반평짜리 감옥. 나는 20년째 징역살이를 하고 있고. 허허, 내 인생 3분의
1이 이 짓으로 지나갔구먼." "다 암시롱
왜 그러고 있는 것이여?" "고생을 할 때 하더라도 한 번 용이 되는 게 우리
꿈이지. 지금 와서 포기할 수는 없는
거지. 주변 사람들 보기도 그렇구.""감옥에서 20년 보내고 나와서 지팡이 짚은
늙은 용이 되면 뭘 하나? 그 시간, 그
정성 그 노력 가지고 포장마차라도 했으면 지금쯤 재벌됐겠다."그때 포장마차
주인이 우리 쪽으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말했다. "20년 아니라 50년을 포장마차를 해도 여전히 포장마차
하는 사람도 있어." 포장마차 주인은
도마에 횟감으로 오른 물고기처럼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다 도저히 못 참겠다
는듯 끼여 들었다.
"오늘은 절대 외상 안돼요,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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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저수지의 지킴이들

 방학식을 하던 날, 저수지가
있는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따로 모여 선생님에게 훈시를 들어야 했다. "너희들
이번 방학에 못에 갔다가 걸리면 몽땅퇴학이야.
선생님이 매일 올라가 볼 거니까 절대 못 가에 얼씬거리지도 마라.".

우리는 초등학교에 퇴학 제도가 없다는
걸 입학 전부터 벌써 알고 있었다.
또 미안하게도 입학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게 있었는데 여름방학 동안 한 번도 선생님이 못에 올라온 적이 없다는 것
이다. 그래서 이튿날 부터 작당을 해서
들마루를 들고 개구리처럼 와글거리며 저수지로 향했다. 저수지에는 크나큰

물뱀으로 화신한 지킴이가 살고, 달밤이면
물귀신이 허연 머리를 풀고 '반딧불 좇아서 즐긴다'는 노래를 부르며, 전
쟁 때 갖다 버린 포탄이 바닥에 득시글거린다고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전혀 무섭지 않았다. 우리 자신이 물귀신인
듯, 지킴이인 듯, 노련한 포탄인 양
들마루를 저수지에 띄워 놓고 여름방학 내내 거기서 살았다.

헤엄 못 치는 아이들은 들마루에 앉히고
헤엄치다 지치면 들마루에서 한 잠 자고 물에 띄워 놓은 수박이며 참외를
건져 먹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흰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 것이다.

선생님을 보자마자 아이들은 놀란 개구리처럼
물 속으로 풍당퐁당 뛰어들었는데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나는 고스란히
노출될 위기에 처했다. 아이들은 물
속에서 고개만 내민 개구리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야, 이 놈들아. 내가 벌써 다
봤다. 당장 나오지 못해!" 선생님은 저수지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쳤다.

개구리들은 들마루를 떠밀어 선생님
계신 반대쪽으로 몰아갔다.

"하하, 요놈들 봐라." 선생님은
거센 콧김을 몰아쉬며 자전거를 몰아 반대쪽에 이르러 간첩 생포를 눈앞에 둔
대대장처럼 의기양양하게 고함을 쳤다.
"이리 와도 소용없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순순히 손들고 나와라.".

가짜 개구리들은 들마루를 떠밀어 다시
반대쪽으로 갔다. 선생님은 번개처럼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수첩을 꺼내
이름을 적을 준비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반대쪽으로 들마루를 끌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왔다 갔다
하다 하루 해가 저물고 새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됐다. 개구리들도 물 밖으로 나와 각자 팬티와 신발을 집어
들고 집으로 도망쳤다.

이상한 건 그 때 들마루를 타고 놀았던
아이들 가운데 물귀신에 잡혀 먹힌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생각하면 아이들이 아이들의 구명조끼였고
튜브였고 구명선이며 지킴이였으니까. 그 선생님, 아직도 저수지에서
아이들을 호령하고 계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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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내가 사랑한 반말족

이 세상에는 또, '반말족'이라는 부족이 있다.

이 부족은 태어나면서부터 반말을 하도록
스파르타식의 엄격한 훈련을 받는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물레방
아가 돌아가는 오지 중의 오지에서 그
훈련을 받은 반말족 아이를 내가 실제로 목격한 바, 제 아버지에게 '아부지,
니 밥 먹으란다' 하러 나왔다가 처음
보는 어른에게 눈을 말똥말똥 뜨고 '니 여까지 말라꼬 왔나' 하고 검문까지
한다. 이 반말족은 전국 각지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데, 내가 비교적 최근에 만난 반말족을 소개해 볼까 한다.

요즘 내가 작업실을 지어놓고 이따금
들르는 시골은 밤 아홉 시만 되면 온통 캄캄해지고 인적이 드물어진다. 면사
무소가 있어 면에서 제일 번화한 곳
역시 노래방 하나와 슈퍼마켓을 제외하면 불빛조차 드물어 쓸쓸한 생각마저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한번은 차를 길가에
대놓고 쓸쓸함을 위로해 줄 맥주 따위를 사려고 구멍가게에 들어갔다.

졸린 눈을 한 주인이 한없이 느린 동작으로
비닐 봉지에 넣어주는 물건을 들고 나왔더니 차가 없어졌다. 다행히
머잖은 곳에 경찰차의 경광등이 반짝이고
있었다. 제복 차림에 건들거리며 순찰차로 가는 사내가 있어서 그를 불
렀다.

"아저씨! 아저씨!"

사내가 돌아보는데 나오는 말이 대뜸
반말이었다.

"나 말이야?"

나는 그때까지도 그가 반말족 가운데
하나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 혹시 여기에 세워뒀던 차 못 보셨나요?"

"저기 있잖아."

사내가 손짓하는 곳을 보니 내 차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길 반대편으로 돌려져 있었다. 나는 내가 세워둔 자리를
착각했나 생각하고는 차로 가서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팔짱을 끼고 나를 지켜보던 사내가 천
천히 다가왔다.

"이거 당신 차 맞아?"

나는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느닷없이 언성을 높여 내가 차를 제대로 주차하지 않고 열쇠를 꽂아둔

채 방치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곤 한
손에 내 차 열쇠를 꺼내들고는 자신이 아니었다면 이 차는 지체없이 도난을
당했을 것이며 반드시 범죄에 이용되어
평화로운 치안질서를 어지럽히게 되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내가 가게에
들어갔다 나온 시간이 오 분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차문이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차가 도난
을 당할까 염려하는 한편, 그 차에 올라타
차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 세우고 문을 잠근 뒤, 차 주인이 오기까지 기다
려 준 여러 가지 배려에 대해 감사하다고
정중히 말한 다음 열쇠를 돌려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열쇠를 쉽게 돌
려 주지 않았다.

"뭐 하는 사람이야? 어디 살어?"

비로소 내게 어떤 느낌이 왔다. 앗,
반말족이다!

그러나 나는 신중하게 확인을 했다.

"저는 그냥 면민입니다. 따라서 이 면에
살지요. 아저씨는 누구시죠?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왜?"

"전에 제가 살던 깊은 산 속에 살던
사람들과 혹시 한 집안이 아닌가 해서 그럽니다. 성함은? 본관은? 고향은?"

"지금 공무집행 중인 경찰에게 장난하는
거야, 뭐야?"

"앗, 경찰이셨나요? 정모를 착용하지
않고 슬리퍼를 신고 있는 경찰을 본 적이 없어서 몰라봤습니다. 그런데 요즘
경찰은 근무 중에 반드시 이수시개를 물고
시민을 상대하라는 규칙도 새로 정해졌나요?"

그는 눈을 치켜떴다.

"어라. 이거 이제 보니 고맙다는 인사는
안 하고 트집을 잡네?"

"아까 고맙다는 인사는 드렸습니다.
아, 그 인사는 인사가 아닌가요? 무슨 뇌물을 바라시는 것은 아닐 테고."

그러자 그는 그렇지 않아도 새우처럼
가는 눈을 한껏 가늘게 뜨더니 내게 면허증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그
에게 먼저 경찰 신분임을 확인시켜 달라고
했다. 그는 면허증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고 나 역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그가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는
한 내 면허증을 보여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어이가 없어 하면서 다른
경찰을 불렀는데 그게 바로 내가 바라던
바였다. 우리에게 다가온 근무자는 근무 복장이 완벽했고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 처음부터 존대말을 하는 그에게
나는 면허증을 내밀었다. 그는 무전기로 내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확인
한 뒤 면허증을 돌려주었다.

"이제 보니 나이도 적지 않은 사람이
왜 그렇게 애처럼 딱딱거리고 그러셔. 나하고 동갑이구만."

반말족은 그제야 말투를 조금 바꾸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겉보기로는 나보다 서너 살
은 더 먹은 것처럼 보였지만. 내가 그에게
다 확인했으면 열쇠를 돌려달라고 하자 그는 아쉽다는 듯 열쇠를 돌려주
면서 말했다.

"법대로 하면 당신은 딱지를 끊어도
할 말이 없어.

내가 다 한 동네 사람이라 봐줄라구
그런건데 그렇게 복장 따지고 반말 한다고 따지고 그러는 게 아니지. 차가 있
으면 단가. 제대로 간수를 할 줄 알아야지
말이야."

나는 차문을 열고 시동을 건 뒤, 유리창을
내리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자, 그럼 계속 근무해."

그는 뜻밖이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자네하고는 한 집안이야. 나중에
종친회에서 보자구."

그가 무슨 말인지 몰라 멍해 있는 사이에
나는 유유히 차를 몰아 작업실로 향했다.

다음날, 나는 우연히 그와 면사무소
앞에서 마주쳤다. 내가 우체국으로 가는 길을 묻자 그는 깍듯이 존댓말로 대답을
했다. 나도 질세라, 도움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다고 했더니 그는 경례까지 붙였다. 그 뒤로 우리는 몹시 친해졌다.

<참고 : 반말족을 만났을 때의 대응법>

1) 본인이 반말족일 경우 함께 반말을
함으로써 한핏줄임을 확인시킨다.

2) 본인이 반말족이 아닐 경우에는 아닐
경우에는 무조건 큰소리로 상대한다. 반말족의 라이벌 부족으로는 '목청 큰
놈이 이긴다' 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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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삼생의 연애

1.
'나'는 요즘 연애중이다. 1997년 10월 1일 오전 11시 22분. 광화문 근처를
걸어가면서 시티폰으로 연인에게 전화를 건다. 호출신호가 부르르르륵,
울렸기 때문이다. 내 애인은 압구정동에서 휴대폰을 받는다. 예전에 써던
아날로그 방식보다는 나은 디지털 휴대폰이지만 신호가 울리고 나서 한참
있다가 받는다. 내 애인의 목소리는 우주인처럼 울린다. 그는 내 목소리가
우주인 같다고 불평한다.
'또 바꿀 거야? 그 얘기 하려고 호출했어?'
휴대폰은 음성신호를 팔천 조각으로 나누어 전송하는 방식으로 일만삼천
조각으로 나누어 전송하는 PCS보다는 음질이 선명치 않다고 내 애인은
말한다. 자신이 전화를 바꾸려는 것은 나에게 언제든, 쉽고, 빠르게
'접속'하고 싶어서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는 내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게
너무 오래됐다고 불평한다. 이럴 때 남자들이란 꼭 어린애 같다. 전화를 끊고
사이버 카페에 들어간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성억제'
시인의 시가 들어있는 사이트에 들어가 그의 연애시를 '퍼온다'.
이어 애인의 PC통신 ID 앞으로 몇 마디 사랑의 맹세를 덧붙여 전송한다.
전송이 끝나면 그의 호출기가 울릴 것이다. 전자메일이 왔을 때 호출기가 울리는
서비스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내 연인은 켜면 곧바로 위성으로 연결되는 단말기가 왜 아직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리면서 돌도끼처럼 묵직한 노트북을 꺼내 휴대폰에
연결하고는 메일을 읽을 것이다.
집에 도착한다. 그가 메일을 읽고 나서 내 자동응답기에 남긴 메시지를
확인한다. 그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나도 그의 자동응답기에 녹음한다.
'사랑해. 근데 말야. 우리 만난 지 얼나나 됐지? 이러다가 얼굴 한 번 못
보고 통신만 하다가 늙어 죽는 건 아닐까......'
2
전생에, 그러니까 백이십 년 전의 '나'는 늙은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얼마 동안이나 그 자리에 나와 앉아 있었던가. 그러나 내 사랑은 오지 않고
바람과 구름만 오갔다.
문득 아득한 어두운 벌판 끝에서 한 사람이 삿갓을 쓰고 나타났다.
그 사람은 발을 절뚝거리며 백 년은 걸릴 듯 천천히 힘겹게 내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었다. 내 가슴 속에서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모습이
분명했다. 바로 그였다! 나는 두 팔을 벌리고 끝없는 들판으로 뛰어나갔다.
그도 나를 알아보고는 삿갓을 벗어던지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달리고 또 달렸다. 우리 사이의 거리는 십 리에서 오 리로, 오
리에서 일 리로 줄어들었다. 드디어, 마침내, 어쨌거나, 하여튼 우리는
서로를 얼싸안았다.
'보고 싶었어.'
'왜 편지를 안 한 거야. 삼 년 내내 매일 여기 나와서 기다렸단 말야.'
'거기에는 우체부가 들어오지 않았어. 내 사랑을 전해줄 봉화대도 없었고. 난
삼 년 동안 걸어서 너에게 온 거야. 내가 편지이며 우체부이며 봉화야.
그리고 너의 나이기도 해.'
'사랑해. 이젠 정말 헤어지지 않을 거야.'
'그래, 죽을 때까지.'
그래서 우리 두 사람은 끌어안은 채 굶어죽었다.
3
내생에 우리는 어떻게 연애를 할까. 그가 지구에서 가장 젊고 멋졌을 때의
모습을 바탕으로 구성한 홀로그램을 앞에 두고 그가 잘 뿌리는 향수에 체취가
합성된 냄새가 은은히 풍겨오는 가운데 그를 향해 사랑한다고 쓸쓸하게
속삭이는 건 아닐까. 그럼 그는 목성에서 중계하는 행성간 통신으로 나의
메시지와 홀로그램을 받고 촉감까지 합성된 새로운 버전의 홀로그래피를
보내오겠지. 십 년 동안 해왕성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일하면서 밴 새로운
냄새도 함께.